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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선 Nov 18. 2023

적(敵)

적(敵)에 대한 개념이 언제부터 내게 각인 됐을까. '적'이라는 것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서로 싸우거나 해치고자 하는 상대'를 말한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를 떠올리면 친구들과 주먹다짐을 한다고 꼭 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싸운 건 그때 싸운 것이고 친구는 계속해서 친구였다. 그리고 살아보니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아군이라고 안 싸우는 것도 아니고 적이라고 날 항상 해치지만도 않는다.

중학교에 들어와 첫 시험이었던 중간고사 평균 점수는 86점. 반에서 10등 정도의 성적이었다.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성적표가 교실 뒤에 붙여졌고 난 다른 친구들의 성적도 확인할 수 있었다. <93점>.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의 성적이었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초등학교 때는 몰랐던 느낌. 경쟁심이었다. 그 이후 그 친구는 내 맘 속에서 공부할 때만큼은 일종의 적(敵)이었다. 그러나 경쟁심과는 별개로 친구였기에 친하게 지냈다. 서로 모르는 것은 물어보았고 혹시 수업시간에 졸았을 때는 책을 빌려봤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1학년 말이 되었을 때 우리 둘은 반에서 1, 2등을 서로 다투고 있었다. 들어올 때 반에서 10등 했던 학생의 성적이 이렇게 올랐으니 당연히 우리 반의 평균 성적이 전교에서 좋아진 건 자명하다.


적(敵),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는 라이벌이었다. 그중 ‘선의의 라이벌’. 이는 살아가는데 도움이 많이 된다. 라이벌 의식이 없다면 사람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앞서려는 의지가 사라지니 자신이 하는 일에 긴장감이 없어지고 무기력해질 가능성 높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라이벌 의식도 문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에서 이기려 하기 때문이다. 이때는 적(敵)에 대한 배려가 없을뿐더러 적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적을 인정하는 가운데 공정한 규칙과 원칙에 입각한 ‘선의의 라이벌’이 중요한 것이다.

예전에 재밌게 봤던 스피드 스케이팅의 이상화와 고다이라 나오도 선의의 경쟁자다. 이들은 세계 1, 2위를 다투었다. 두 사람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실력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경쟁자의 실력을 떨어뜨리려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실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다. 평창 동계 올림픽 때였다. 고다이라 나오가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고 경기를 마친 다음 이상화의 경기가 시작될 때까지 관중들은 지속적으로 환호성을 보냈다. 고다이라는 이상화의 경기에 방해될까봐 관중들에게 자제해 달라는 제스처를 보내 이상화가 온전히 경기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고다이라 금메달, 이상화 은메달. 고다이라는 이상화가 경기를 마친 뒤 포효하기보다는 그녀에게 다가가 안아주었다. '선의의 경쟁자'이자 친구끼리만이 느낄 수 있는 동질감을 나눈 것이다.

한편 미국 야구 메이저리그에는 무려 30개의 팀이 있다. 그중 아메리칸리그 특히 동부 쪽의 팀들이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유에는 여러 요소가 있지만 세기의 라이벌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존재도 한 몫한다. 이 두 팀은 다른 어느 팀보다 경쟁이 심하여 선수 구성에서부터 경기 시설까지 모든 면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팀 연봉 순위도 항상 상위권에 있으며 선수들도 우승이라는 경력을 꿈꾸며 이 팀들에 들어오기를 선호한다. 그 결과 100년이 넘는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두 팀의 역대 우승 횟수가 1/3 정도를 차지한다.


이처럼 선의의 라이벌은 필요하다. 이는 개인뿐만이 아니라 팀과 조직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경쟁이 그들이 속해있는 사회와 조직을 건강하게 만든다. 위에 언급한 이상화-고다이라 나오, 뉴욕 양키스-보스턴 레드삭스의 경쟁도 두 사람, 두 팀의 성장으로 끝나지 않았다. 각 분야의 개인들과 팀들이 그 분야 안에서 서로 적(敵)이지만 선의의 라이벌로 경쟁을 펼침에 따라 스피드 스케이팅과 메이저리그 야구의 군집 전체 질이 높아지는 효과도 가져왔다.

아쉬운 점은 우리 사회에서는 선의의 라이벌을 쉽게 인정하기 힘들어 보인다. "winner takes it all" 승자 독식 문화와 갈라치기의 만연화 때문일까. 특히 정치에서는 우와 좌가 서로를 인정하고 일정한 규칙과 원칙 안에서 공정한 경쟁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우리 편 아니면 모두 적(敵)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양성을 해칠뿐더러 사회의 건강성도 해친다. 우리 사회에서 적을 진정한 적으로 인정하는 선의의 라이벌 의식이 함께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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