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골든컵을 거머쥔 반이
긴장감과 중압감에 공기마저 가라앉은 이곳은 한얼고 기말고사장이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기말고사 마지막 날이 된 것이다.
여학생 교실 먼저 지켜보자. 반이와 진희가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문제를 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이번엔 남학생 교실이다. 어쩐지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건이는 얕게 코 고는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다. 답안지는 3번으로 곱게 마킹되어 있다. 게다가 윤수의 자리는 며칠째 비어 있다.
“종례하자.”
민규가 말하자 시험 답안을 맞춰보던 학생들이 일제히 자리에 앉았다.
“음. 다들 시험 준비하느라,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시험 치느라 고생했다. 오늘만큼은 시험이 끝난 기쁨을 맘껏 만끽하도록. 그리고 나쁜 짓하면 절대 안 돼. 알았지?”
학생들이 벙찐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민규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왜들 그런 표정으로 보는데?”
“선생님이 욕 한마디 없이 말씀하시는 걸 처음 본 것 같아서요.”
민규는 뜨악했다. 내가 그렇게 욕을 많이 했나.
“큼. 바르고 고운 말을 쓰는 게 교육자로서의 덕목 아니겠니. 너희들도 나처럼 노력해서 바르고 고운 말을 쓰도록 하여라. 알았느냐?”
민규는 짐짓 목청을 가다듬어 말을 이었고, 학생들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주억거렸다. 교실 가장 뒤에 앉은 건이가 가장 흐뭇하게 웃고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끝났다아~~!”
“제대로 풀지도 않았을 거면서 시험 끝난 게 그렇게 좋아?”
“반이 너, 나 무시하는 거지? 그래도 국어는 풀었다구.”
“형 과목이니까 최소한은 했어야 했겠지.”
“흑. 맞는 말이지만 너무 아파.”
반이는 쿡쿡 웃으며 건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쨌든 끝났으니까, 오늘 뭐 할까?”
“영화 보러 갈래? 마블 새 영화 나왔던데.”
“좋아!”
“뭐든 좋대.”
반이는 공부를 못(안)해도 늘 해맑은 건이의 손을 잡았다. 이 손은 왜 이렇게 나에게 믿음을 줄까. 저렇게 언제나 해실거리는 녀석의 손인데. 내가 뭐만 하면 다 좋다는데.
그래서...였구나.
새삼 반이는 건이를 바라보았다. 건이는 언제나 반이를 보며 웃고 있었다. 반이가 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좋다고 말해 주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반이 편이었다.
‘내 세상에 건이 같은 애는 앞으로 없겠구나.’
반이는 건이의 손을 더 꼭 부여잡았다. 절대 놓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그 시각. 난주의 집.
“일어났어?”
“...몇 시야, 지금?”
“열두 시. 아침 먹어.”
마치 신혼부부와 같은 이 대화는 난주와 윤수의 그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혼자 지내온 난주가 집에 남자를 들이는 일은 길가에 굴러다니는 낙엽을 줍는 일과 같았다. 하지만 윤수만큼 오랫동안 이 집에 머무른 남자는 없었다. 그만큼 난주에게 윤수는 이미 특별한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너는 학교 안 가냐.”
“너도 안 가면서 나한테 괜히 그래.”
“딴소리 말고. 너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출석일수 따지면 내가 너보다 더 급하거든. 너한테 들을 소리 아니네요.”
사랑이 무섭긴 한가. 난주의 입에서 험한 말이 싹 사라졌다. 적어도 윤수에게는 결단코 욕설이나 비방을 내뱉지 않았다.
“된장찌개 맛있네. 네가 한 거야?”
“이래 봬도 자취 5년차라구. 직접 육수 내서 끓인 거야. 아무한테나 안 해 준다.”
“영광이네.”
윤수는 진심으로 감동할 뻔했다. 이처럼 나에게 진심으로 모든 마음을 내어준 상대에게 처절한 복수를 해야 한다니. 새삼 반이의 존재감이 섬뜩하게 윤수의 마음을 관통한다.
‘미안하지만, 내겐 우정이 먼저야. 도저히 건이를 배신할 수 없어.’
“성적 나왔다!”
여학생 교실이다. 이번엔 반전이 있는지 웅성거림이 심상치 않다.
“반이야! 이번엔 네가 1등이야!”
진희가 벅찬 목소리로 외쳤다. 어째선지 진심으로 기쁜 모양이었다. 정작 반이는 자신이 뭘 한 건지 실감이 나지 않아 멍해져 있다. 진희는 그런 반이의 어깨를 두드리기도 하고 목덜미를 끌어안기도 하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내가...1등?”
반이의 멍한 표정은 건이 앞에서도 계속되었다. 건이는 언제나처럼 해실해실 웃으며 연신 대견해했다.
“우리 반이 정말 대단해. 1등이라니. 정녕 그걸 해내다니... 진짜 엄청나.”
“뭘... 그냥 얼떨떨해.”
“너 공부하기 싫다는 거 다 구라지? 너 사실 공부 좋아하지? 내가 다 알아.”
“알긴 뭘 알아. 맹추야. 나 공부 극혐하거든?”
“전교 1등한테서 나올 말은 아니네요, 뭘.”
건이는 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정말, 뿌듯하다 진짜. 내가 전교 1등의 남친이라는 거잖아, 지금?”
반이는 질린 듯한 표정으로 건이를 바라보았다. 건이는 외마디를 이어 붙인다.
“쩐다.”
수진은 연신 눈물을 훔쳤다. 남편을 잃은 뒤로 감정 기복이 심해진 수진을 반이는 자주 달래야 했다.
“좋은 일에도 이렇게 울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러게, 반이야. 흑, 정말 대단하고 대견해. 힝, 엄마가 울어서 미안해.”
“아니야. 미안하긴.”
수진은 코까지 팽 풀며 멈추지 않는 울음을 달래려 애썼다.
“아니, 아직 서울대 붙은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울어. 이 아줌마. 딸 서울대 붙으면 기절하시겠어.”
“진짜 그러려나? 어머, 그럼 어떡하지?”
수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반이는 그 모습이 웃겨 깔깔 웃으며 말했다.
“엄마 땜에 무서워서 서울대 못 가겠다.”
“어머, 얘는! 그런 소리 마. 엄마 정신 똑바로 붙잡고 있을 테니까 서울대 가. 맘 놓고 가. 응?”
“언제는 안 가도 된다며?”
“갈 수 있으면 가는 거지, 기집애야. 너 진짜, 자꾸 엄마 욕심 나게 한다?”
“헤헤. 엄마 사랑해.”
반이는 오랜만에 엄마 품으로 쏙 들어가 안겼다. 수진은 그런 딸의 모습에 또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우리 딸내미 언제 안아 봤나 싶네. 엄마가 너무 무심했네, 그동안.”
“그랬네. 우리 엄마가.”
“이제 자주 안아줄게, 우리 딸.”
“됐네요. 자유이용권 아니거든.”
“아흑. 아쉬워라.”
반이는 쿡쿡 웃으며 엄마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수진은 남편이 떠나고 난 후 오랜만에 가슴 속이 따뜻한 마음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