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내 남친
‘기말고사 D-10’
반이의 책상 위. 디데이 달력이 어느덧 기말고사 10일 전을 알렸다. 커피로 버텨오던 날도 이제 슬슬 한계에 부딪히는 모양이다. 반이는 코끼리만큼 무거워진 눈꺼풀을 겨우겨우 들어올리며 한 장 한 장 문제를 풀어나갔다. 시간은 새벽 세 시.
‘너무 무리하는 건가.’
반이는 물을 마시려고 일어났다가 잠시 비틀거렸다.
‘조짐이 안 좋은데.’
일단 침대에 걸터앉은 반이는 그대로 거꾸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 날.
의도치 않게 평소보다 잠을 많이 잔 반이는 컨디션이 매우 좋아졌다.
‘종종 이런 날도 있어야겠는데?’
중간고사 성적이 기대했던 것보다 좋지 않아서 최근에 자신을 좀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밀어붙였는데, 어제는 자칫 잘못하면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었다. 건강이 무너지면 모든 걸 다 잃는다. 반이는 잊지 않으려고 되뇌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어김없이 건이가 기다리고 서 있다. 이 변함없는 일상. 이 한결같은 행복.
반이는 건이에게 달려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잘 잤어?”
“그럼. 오늘 좋아 보이는데?”
“응.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더 잤거든.”
“어쩜 그리 예쁜 짓을 다 했대?”
“몰라. 좀 무리했나 봐.”
“그럴 만도 하지. 갈까?”
건이가 내미는 손. 언제부턴가 이 손을 잡지 않으면 어디에도 가지 못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제든 꼭 붙잡고 놓지 않으리.
“응. 가자.”
“하아... 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좌중을 둘러보는 이는, 다름 아닌 윤수였다. 윤수는 요즘 정난주 일파와 함께 섞여 한 학교씩 적들을 무찌르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인원으로는 매번 열세인데도 윤수가 합류한 이래로 한얼이 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늘도 한얼은 6명으로 30명 일파에게 덤벼서 이겼다. 이제 오로지 한 학교만 잡으면 된다.
“채윤수. 진짜 대박이다. 17대 1이 진짜 되네?”
난주는 진심으로 윤수의 실력에 감탄한 듯했다. 일당백이라는 게 무엇인지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 어려운 것 같았다.
“넌 대체 이걸 어떻게 숨기고 산 거야?”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어. 기회가 없었을 뿐.”
윤수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 기회. 이제 내가 계속 만들어 줄게. 서울은 물론, 전국을 제패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난주는 꿈에 부풀어 저도 모르게 눈을 까뒤집으며 말했다.
“이제 이번 여름방학 전에 나성고만 잡으면 서울은 끝이야. 채윤수. 계속 할 거지?”
윤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주는 윤수를 끌어안으며 양 볼과 목덜미 곳곳에 키스를 퍼부었다.
“넌 진짜 내 보물이야. 채윤수. 사랑해.”
윤수는 난주의 목을 마주 그러안으며 생각했다. 반이는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본 걸까. 이렇게 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던 걸까. 난주가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바로 이 사실을. 여자들의 감이란 건 이렇게나 무서운 거구나.
‘차건. 넌 절대로 하반을 배신하면 안 되겠다. 그러는 순간 살아남긴 힘들겠는데?’
한편, 반이네 교실. 이제 막 5교시가 끝난 참이다. 전교 1등 진희는 거의 녹아내리며 반이에게 말했다.
“5교시가 수학이라니... 이건 재앙이야.”
“내 말이. 졸려 죽는 줄.”
“하나도 안 졸려 보이거든?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쌩쌩해?”
진희는 유난히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반이에게 괜한 트집을 잡아댔다. 반이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졸려. 진.짜.로.”
“아우, 몰라. 얄미워, 저년 저거.”
진희는 욕을 내뱉으며 책상에 콱 엎드려버렸다.
“6교시는 국어네~ 신난다아~”
반면 반이는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다음 수업을 준비했다. 국어 수업은 반이를 포함한 여학생들 모두가 좋아하는, 차윤 선생님 수업이다. 그 말을 들은 진희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다가 몸서리를 치며 일어나 외쳤다.
“설레서 잠도 못 자겠잖아, 이 망할 기집애야!”
방금까지 5교시의 음습한 기운이 머물렀던 교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지금은 쨍하게 환기까지 완벽하게 되어 있다. 그곳에 윤이 반가운 손님처럼 찾아왔다.
“뭐야, 공기 왜 이렇게 좋아?”
역시. 우리 쌤은 우리의 정성을 알아보는구나.
“수업할 맛 제대로 나네. 오늘 진짜 열심히 해 볼게?”
저희도요. 선생님.
심지어 오늘은 고전문학인 <서경별곡>을 배우는데도 아무도 졸지 않는다. 오히려 다들 작품 속 주인공이 되어 저마다의 심상 속에서 유난히 애절하다. 떠나는 임은 윤의 얼굴을 하고, 미저리처럼 집착하는 화자는 각자의 얼굴이 된다. 어째 좀 살벌한 풍경 같기도 하다.
시간이 언제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종료령이 울렸고, 학생들은 모두 긴장이 풀려 장탄식을 내뱉었다.
“힘들었지? 인사는 생략할게. 푹 쉬어.”
저 스윗한 인사. 어떻게 인사를 생략해요,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윤이 쌤 대박이다 진짜.”
“근데 딱히 뭘 한 것 같진 않은데.”
“반이 넌 꼭 좋은 분위기에 초를 치더라. 너 T야?”
“큭큭... 몰랐어? 나 극 T야~”
진희는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쩐지...”
그때였다. 교실에 남아있던 달콤한 공기를 깨는 한마디 외침이 들려온 것은.
“하반! 가자!”
잉? 이제 6교시 끝났는데?
반이는 놀란 토끼 눈으로 교실 뒷문을 바라보았다. 거짓말처럼 건이가 서 있었다.
“...지금...?”
건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갈 길을 재촉했다.
“뭐...지? 쟤 지금 뭐하는 거야?”
“나도 몰라. 뭔 일 있나?”
반이는 일단 짐을 챙겨 건이 쪽으로 걸어왔다.
“왜 지금 가?”
“끝났잖아. 7교시.”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주변에 킥킥대는 여자애들 웃음소리가 들린다. 반이는 어디로든 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남친이지만 진짜 꼴통이다.’
“안 가?”
“너... 주변에 가방 메고 돌아다니는 애들 있어, 없어?”
“음... 없네?”
“그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한 번쯤은 해 볼 수 있지 않아?”
“그런...가?”
팍!
“아우 아파! 반이 너 갑자기 왜 그래!”
반이는 자기도 모르게 로우킥으로 건이를 걷어차 버렸다.
“진짜 차 버리기 전에 빨리 교실로 가. 나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단 말이야!”
“아, 알았어. 미안!”
건이는 허둥지둥 교실로 되돌아갔고, 반이네 교실은 왁자한 웃음으로 한바탕 뒤집어졌다.
“난 몰라...”
망연자실한 반이는 터덜터덜 자리로 되돌아와 푹 엎드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