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에필로그

by Charles Walker

건반이 학교를 떠난 이후 세 번의 봄이 지나갔다. 시간은 변함없이 흐르고 아이들은 그만큼 더 자라났다.

건반 주니어는 아들이었다. 어느덧 세상에 난 지 햇수로 2년 차가 되어 아장아장 걷고 옹알거리며 노래도 부른다. 그 녀석을 돌보는 것이 건이와 반이의 유일한 낙이 되어 있다. 지금은 낮잠 자는 아이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아이의 왼쪽, 오른쪽에 각각 누워 있는 중이다.

“어쩜 이렇게 작지.”

“이 작은 발로 여기저기 다니는 게 너무 신기해.”

“그러니까... 얘를 진짜 반이 네가 낳았어? 난 아직도 실감이 안 나.”

“나도 그래.”

반이는 여전히 수줍게 웃으며 답했다. 그때, 도어록 소리와 함께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현관 쪽에서 들려왔다. 아이가 움찔 놀라자 부모도 덩달아 놀란다.

“아이고, 무거워. 차 서방! 빨리 나와서 이것 좀 들어 줘!”

기어이 아이를 깨우고 마는 깨방정 할머니 수진이었다. 반이가 먼저 아이를 안고 방 밖으로 나가고, 건이가 뒤를 따른다.

“엄마! 이제 막 잠들었는데... 내가 못 살아, 정말.”

“헥. 그랬어? 미안, 딸... 시장 봐 왔는데 너무 무거워서 그만...”

“어머니, 얼른 주세요.”

건이는 수진의 손에 들린 시장바구니들을 들고 부엌으로 가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건이는 반이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이렇게 주말에는 육아를 함께하고, 낮에는 인력사무소에 나가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아직 고정적인 수입원이 없기는 하지만 워낙 넉살이 좋고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여 사무소 쪽에서 건이에 대한 평가가 좋다. 조만간 고정적인 일자리가 들어올 것 같기도 하다.

건이가 일을 나간 낮에는 반이와 수진이 육아 전담반이다. 아무래도 육아 경험이 좀 더 있는 할머니 쪽으로 중심추가 기울 수밖에 없겠지만, 수진은 전혀 불만이 없고 오히려 신난 쪽이다.

“오랜만에 애기 보니까 기운이 넘치는 것 같아. 젊은 할머니 되는 거, 생각했던 것보다 좋다, 얘.”

“엄마도 정말 못 말려.”

“차 서방도 생각보다 책임감 있어. 학교에서나 꼴통이지. 사회에선 꼴통 아니네.”

“거봐. 내가 뭐랬어. 내가 잘 키웠지?”

“제 반은 확실히 반이 몫이죠.”

건이도 넘실넘실 웃으며 넉살 좋게 답했다.

“엄청 많이 사셨네요, 어머니.”

“우리 애기들 먹일 건데 아끼면 안 되지. 딴 건 몰라도 먹을 건 아끼면 안 돼.”

“암요. 아무렴요. 역시 우리 어머니 최고.”

건이가 엄지 척을 날리자 수진은 답례로 윙크를 찡긋 해 보인다.

“사위 사랑은 장모인가. 참 나 원.”

반이가 샘 나는 듯, 샐쭉하다가 건이가 다가와 꼭 안아주자 결국 웃고 만다.

“왜 이래, 엄마 앞에서.”

“뭘. 보기 좋구만. 애기 이리 주고 니들은 들어가. 얼른 둘째 봐야 할 거 아냐.”

“할매! 어휴, 주책. 내가 못 살아, 정말.”

“...어머님 말씀이 구구절절 너무나도 옳은 말씀뿐이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들어가 보겠사옵니다.”

건이가 능글맞게 웃으며 아이를 수진에게 안겨 주고, 반이의 손을 잡아끌자 반이가 짐짓 질색하며 버틴다.

“남편아, 벌건 대낮이다. 제발 자제 좀.”

“헤헤. 좋은 걸 어떡해.”

“...내가 애를 몇 명을 키우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때, 건이의 전화가 울렸다.

“어, 채꼴통. 웬일?”

윤수인 것 같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로 울음소리 같은 게 섞여 들린다. 건이와 반이는 둘 다 걱정 가득한 얼굴이 되어 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윤수야. 왜?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차건. 너... 이런 기분이었냐?>

“뭐가? 어떤 게.”

<지원이 가졌을 때... 이런 느낌이었냐고.>

반이가 먼저 알아듣고 전화기를 건이에게서 뺏어들었다.

“채윤수! 너 애아빠 되는 거야? 난주 아기 가졌대?”

건이는 그제야 눈이 휘둥그레져서 반이 손에 들린 전화기 쪽으로 자신의 귀를 가져다 댄다.

<응. 한 달쯤 됐다나 봐. 나 지금 실감이 안 나.>

“하다하다 이런 것까지 따라하냐? 너 진짜 그러다 진짜 내 꼬붕 되겠다!”

<닥... 아니, 조용히 해. 그리고 넌 애아빠가 아직도 그런 저급한 말을 쓰냐? 꼬붕이 뭐냐, 꼬붕이.>

“아... 맞다.”

반이도 눈을 흘기며 건이를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축하해, 윤수야. 너도 이제 진짜 행복하겠다.”

<응. 난주도 무척 기뻐해. 너한테 안부 전해 달래.>

“그래. 우린 늘 좋아. 준비가 되면 언제든 만나자.”

그렇다. 건반 커플은 학교를 떠난 이후 윤수는 딱 한 번 만났고 난주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난주는 윤수의 지극정성 덕분에 지독한 우울의 늪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아직도 반이의 얼굴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응. 잘 지내, 건반.>

전화는 끊어졌고, 건이는 한동안 큭큭대며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윤수 새끼... 너도 이제 곧 밤잠 꽤나 설치겠구나.”

“걔네도 이제 어른이 되는 거지 뭐. 원했든, 원치 않았든.”

건이는 돌연 반이의 손을 잡아끌어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왜 이래, 진짜.”

“아니. 일단 누워 봐.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반이는 때아닌 남편의 진지함에 의아해하며 건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반이야. 우리 형이 나한테 준 숙제가 있거든. 그게 뭔지 알아?”

“뭔데?”

“뭘 해서 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 말고, 어떤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 말고, 이 생각을 하라고 했어. 바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반이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윤쌤답네.”

“나, 지원이 아빠 되기 전까진 진짜 되는 대로 막 살았거든. 학교 때 내 별명 알잖아. 꼴통.”

“그랬지.”

“근데 형이 그 질문을 나에게 한 뒤부터 너도, 윤수도, 심지어 그 악독했던 배민 쌤까지도 모두 달라 보였어.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계속해서 물어보는 동안에 세상이 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건이야.”

“응.”

“너도... 잘 살았네. 좋은 아빠가 될 준비 하고 있었네.”

“그래?”

“응. 그래.”

건이는 반이의 입술에 오래도록 입맞추었다. 열린 창문 틈으로 하얀 커튼이 물결처럼 나부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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