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숙제를 무사히 통과한 건이

by Charles Walker

같은 시각. 건이의 집. 윤이의 방에서 윤이와 건이는 마주 앉았다. 자못 분위기가 비장했다. 아래채의 부모님은 애써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듯했지만, 특히 어머니의 충격이 큰 것 같았다. 해서 윤이는 건이를 따로 다시 부른 것이다.

“너도 생각을 해 봐라. 엄마가 저렇게 충격 받으신 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의미인데?”

윤이는 한숨을 푹 쉬며 겨우 말을 이었다.

“그래. 이걸 내 입으로 얘기해야 하는 상황이 참 어이없기도 하지만, 너랑 나랑 아홉 살 터울인 데다가 너는 동년배 중에서도 정신연령이 심하게 어린 편이니 내가 이해하고 말한다.”

“서론이 너무 길고 기분 나빠.”

“그래도 들어 봐, 임마. 엄마 입장에선 너도 아들이지만 나도 뭐야.”

“...아들.”

“내가 지금 결혼을 했어, 안 했어.”

“...안 했어.”

“네가 알기론 내가 연애를 해, 안 해.”

“...안 해.”

“다 커버린 큰아들은 결혼은커녕 연애도 못하고 언제 짤릴지 모를 기간제 교사나 하고 있는데 정작 그 큰아들 직장에 학교랍시고 다니는 작은아들놈은 연애를 찐하게 해서 기어이 애아빠가 됐네? 네가 엄마면 충격 안 받겠어?”

“...받아. 아후, 이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진짜 신경 썼는데!”

“됐어. 이제 와서 그럼 뭐해. 물은 엎어진걸.”

건이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고, 윤이는 그런 건이를 바라보며 저 화상을 어쩌나 하는 표정으로 한숨만 푹 쉬었다.

“끊은 담배 생각이 유난히 간절하다, 오늘은.”

“미안해, 형.”

“됐어. 임마... 아참, 그래. 이참에 너 그거 하자.”

“...뭐?”

“숙제 검사. 학기 초에 내가 숙제 내 줬잖아.”

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형이 그 숙제를 내준 이후로 하루도 그 생각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언젠가 형이 자신에게 물어볼 때 멋지게 대답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내 대답이 지금 상황에 어울릴까? 건이는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말문을 쉽사리 열지 못했다.

“아직 답을 못 얻은 거야?”

“아냐, 그건... 우선 형한테 고마워. 그런 생각... 살면서 처음 해 봤어. 형이 던져준 그 질문 덕분에 진정으로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어. 그래서...”

“...그거면 됐어.”

“...응?”

“숙제 통과라고. 애기 아빠.”

건이는 얼떨떨한 채 제 앞의 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거창한 대답이 속에 많이 남아 있는데. 하지 못한 말이 많은데. 이대로 숙제... 끝이라고?

“살면서 잊지만 마. 네가 지금 마음속에서 내려놓은 답도 살면서 계속 변할 거야. 그래도 살아가면서 그 질문을 잊지 말고 계속해서 떠올리며 살란 말이야.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건이는 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는 몰라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형의 말에 따르면 삶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숙제의 늪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건이의 삶이 그렇게 진창 같지는 않을 것이었다. 건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사람이 되든 믿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혼자가 아니니까.



다음날 아침. 반이의 집 앞.

“반이야.”

반이는 건이를 향해 달려와 와락 안겼다. “잘 잤어?”

“응. 너도?”

“응. 간만에 정말 꿀잠 잤지. 고등학교 입학한 뒤로 열두 시 전에 잠든 것 처음이야.”

“...너도 진짜 치열하게 살았구나.”

“그러게. 결국 이렇게 될걸. 헤헤.”

“...미안. 진짜 미안해, 반이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신경 쓰지 마. 흠. 오늘은 진짜 좀 떨리네.”

“날이 날인 만큼. 확실히 좀 긴장된다. 크흠. 갈까?”

건이는 여느 때와 같이 선뜻 손을 내민다. 그리고 반이는 이내 웃으며 그 손을 덥썩 잡으며 말한다.

“가자.”



“채윤수! 건반 자퇴한대!”

윤수는 벌떡 일어났다. “뭔 개소리야?”

“방금 나란히 자퇴서 내고 지금 교문으로 나가는 중이야! 너라도 얼른 뛰어가 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수는 교실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야! 건반! 니들 거기 안 서?”

나란히 손을 마주 잡고 교문을 나가려던 건이와 반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쫓아오는 윤수를 뒤돌아보며 미소지었다.

“왔어? 디엠 보내 놨는데.”

“인사도 말 한 마디도 없이 갑자기 뭐야. 야, 차건. 자퇴하라는 거 농담이었다고, 새끼야. 진짜 하면 어떡하냐? 너 진짜 바보냐?”

“미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됐다. 너는 꼴통이니 그렇다 치고. 반이는 왜? 반이 1등이잖아. 1등이 자퇴도 해? 검정고시 쳐서 대학 빨리 가게?”

“그러기엔 시기가 늦었네요. 지금 자퇴하면 검정고시 내년 8월에 쳐야 돼.”

“그럼 니들 지금 왜 그만두는 건데, 엉?”

순간, 윤수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니들...”

두 사람은 눈을 맞추고 웃으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반이는 이어서 말했다.

“자세한 얘기는 디엠에다 엄청 장문으로 보내 놨으니까 나중에 밖에서 만나서 얘기해. 그 동안 고마웠다, 채윤수. 잘 지내.”

건이는 말 대신 배웅 나와 준 유일한 친구를 마주 안아주었다. 윤수는 얼떨떨한 채 건이의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차꼴통. 너 진짜 대박.”

“잘 있어. 채꼴통. 밖에서 보자.”

“...엉.”

윤수는 교문 밖을 나서서 저만치 멀어지는 건반 커플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왠지 학교 안에 머무르고 있는 자신보다 한참은 더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은 두 사람이었다. 겨우 며칠이 지난 것뿐인데. 어떻게 저렇게 사람들이 변할 수 있는 걸까. 언젠간 윤수 자신도 난주에게 그런 든든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는 중에...

톡톡톡.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익숙지 않은 손길에 윤수는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보고는 귀신을 본 것처럼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얌마! 놀랬잖아.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쌤!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차라리 때리세요. 적응 안 돼 죽겠어요!”

그 상대는 다름아닌, 수업 시간인데 들어오지 않은 윤수를 데리러 온 민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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