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반응
한편, 반이네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건이에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의논 상대가 있었던 반면, 반이에게는 그 의논 상대라고 할 유일한 사람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아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우리 엄마 진짜 기절하면 어쩌지...’
아무래도 119를 불러놔야 할 집은 저쪽이 아니라 이쪽 집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반이는 몇 번이나 엄마의 방문 앞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방 밖으로 새어나오는 TV 소리와 엄마의 깔깔대는 웃음소리. 저 행복을 도저히 깨고 싶지가 않다. 엄마가 어떻게 찾은 행복인데. 내가 그걸 완성해 주고 싶었는데. 보란 듯이 명문대에 합격해서 아빠 없이도 성공한 인생 살 수 있다는 걸 이 딸내미가 보여주고 싶었는데. 고등학교 2학년에 덜컥 애부터 생겨버렸네.
대체 이걸 어떻게 말하지.
반이는 도저히 엄두가 안 나 제 방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건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쪽 상황은?”
<형이랑 이야기 끝내고, 부모님께도 말씀드렸어.>
“반응은?”
<충격 많이 받으셨지... 하지만 쓰러지진 않으셨어.>
“119 불러놨던 거라면 우리 집 쪽으로 돌려.”
반이의 농담에 건이가 쿡쿡 웃었다.
“웃음이 나와, 지금?”
<미안... 자기가 농담을 너무 재밌게 하잖아.>
“어휴, 못 살아 정말.”
<아냐. 우린 잘 살 거야. 진짜로.>
“속 터진다.”
<혼자 얘기 못하겠으면 내가 지금 갈게.>
‘건이야. 너의 그 말에 어찌나 위안이 되는지 몰라.’
반이는 그 말을 속으로 간신히 삼키고는 말했다.
“아니야. 내가 말해볼게. 두 눈 질끈 감고 말해볼게. 엄마도 임신한 적이 있었을 테니까. 애 배고 있는 나를 어쩌지는 못할 거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사랑해, 하반. 정말 죽을 만큼 사랑해.>
“나도. 나도 많이많이 사랑해.”
꿀 떨어지는 전화를 끊고, 반이는 드디어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까짓거.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야. 엄마 기절하면 119 부르면 돼. 사람 그렇게 쉽게 안 죽어.”
하지만 반이가 이토록 오랜 시간 전전긍긍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수진의 반응은 태연했다.
“밥 잘 챙겨 먹여야겠네.”
“...엄마?”
“왜, 뭐.”
“뭘... 잘못 들은 건 아니지?”
“그래. 제대로 들었어. 너 임신했다고.”
그렇다. 상대는 수진이었다. 서른여덟 창창한 나이에 동갑내기 남편을 떠나보내고 홀로 초등학교 6학년짜리 딸내미를 키워내며 산전수전 공중전 해저전까지 안 겪은 전투라고는 우주전쟁밖에 없던 대한민국 아줌마 김수진이었다. 너무나도 사랑했던 남편이 떠나간 것이 수진의 유일한 눈물버튼이었을 뿐, 여간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다. 심지어 내 딸이 임신하는 그날이 언제가 될지 내심 기다리기도 했다고 한다. 너무 빨라서 약간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엄마. 내 친엄마 맞지?”
“당연하지.”
“기절초풍 안 해?”
“해야 하는 거야?”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너무 뭐랄까, 좀...”
“반이야.”
“...응?”
“소중한 생명이 찾아왔으니까. 이제부턴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해야 해.”
“어, 응... 근데 엄마.”
“응. 말해.”
“서울대... 안 아까워?”
“너 계속 공부한다고 반드시 서울대 간다는 보장 있어?”
‘뭐야, 이 팩트폭행은...’
“그리고 솔직히 말할게. 너 공부한다고 매일 밤새다시피 하고 하루종일 커피로 버티는 거, 정말 마음에 안 들었어. 그게 얼마나 몸 상하는 짓인지 알기나 해? 엄마가 잔소리하려는 거 겨우겨우 꾹꾹 눌러 참았는데 오히려 잘 됐다야. 이제부터라도 몸에 좋은 것 엄마가 잔뜩 차려줄게. 아기랑 같이 맛있게 먹으면 얼마나 좋아.”
‘이 정도면 거의 정신승리 수준인데...’
반이는 수진의 호들갑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진은 진심으로 반이에게 찾아온 새 생명을 반기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를 앞에 두고 배우인 반이는 그 어떤 연기도 해낼 수 없어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엄마는 너 좋은 대학 안 가도 된다고 누누이 말했어. 그리고 1등 성적표 한 번 남겼으면 됐지, 뭘 더 바라? 공부 욕심 하나도 없어. 나중에 네가 좀 더 공부하고 싶으면 애 어느 정도 키워놓고 나서 해도 충분해. 늦지 않아. 엄마가 이렇게 젊은데, 나중에 네 친구들은 너 부러워서 어쩔 줄 모를걸?”
반이도 그 점은 충분히 동의한다. 엄마도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나를 낳았다. 그런데도 아직 이렇게 젊고 예쁘다. 수많은 아저씨들이 엄마를 어떻게 해 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엄마는 꿈쩍도 않는다. 이유인즉슨 아직도 아빠를 못 잊었기 때문에... 어쨌든. 그런 엄마보다 내가 더 젊은 나이인 열아홉에 애엄마가 된다. 나에겐 어쩌면 엄마보다 더 빨리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엄마, 고마워.”
“뭐가.”
“엄마가 나에게 희망을 줬어. 난 이 소식 전할 때 엄마가 기절할까봐 119 불러놔야 하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반이는 눈물을 흘리며 수진을 끌어안았다.
“우리 엄마, 진짜 강하다.”
“강한 게 아니라 짜샤. 어떡하겠냐, 그럼. 다른 방법 없잖아.”
“...응, 맞아.”
“참, 중요한 거. 진짜 혹시나 해서 말인데.”
“응.”
“건이 애는... 맞는 거지?”
“엄마도 진짜!”
반이는 저도 모르게 생애 처음으로 찰싹 소리 나게 엄마의 팔죽지를 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진은 팔을 주무르며 해실거렸다.
“헤헤, 혹시나 해서. 중요한 문제잖아. 우리 딸이 혹시나 애먼 딴 놈한테 잘못 걸렸나 확인은 해 봐야지. 할머니로서.”
“절대절대 그럴 일은 없거든요, 아줌마. 주책이셔, 아주 그냥.”
역시 인생은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다. 거대한 자연의 법칙 안에서 인간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저 상황에 맡기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