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인생 재미없을 틈이 있어?

by Charles Walker

어느덧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3학년은 제각기 입시 준비로 초긴장 상태였고, 그와 동시에 학교 분위기도 동장군이 일찍 찾아온 듯 잔뜩 경직되었다. 배구부실도 예전처럼 자유롭게 드나들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왠지 선배들의 루틴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일날 것 같아서였다.

“아, 학교 재미없다.”

건이가 무심코 던진 말에 윤수가 즉각 반응했다.

“자퇴해라, 건이야.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완전히 무기력해진 건이는 반박할 기운도 없어 한숨만 더욱 크게 내쉬며 말했다.

“하아, 학교 진짜 졸라 재미없다.”

건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당탕 소리가 나더니 교실 문이 매섭게 열렸다.

“차건! 큰일 났어! 하반이... 쓰러졌어!”

건이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나 잽싸게 교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소식을 알려온 친구를 따라 여학생 교실로 곧장 달려갔다.

‘대체 무슨 일이야, 이건...’

교실로 가 보니 일단 반이는 보건실로 후송된 후였고, 건이는 다시 보건실로 내려가야 했다. 알고 보니 반이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다행히도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조치를 받은 후 보건실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심각한 건 아니어야 할 텐데...’

건이는 보건실 앞에서 한참 동안 마음을 다스렸다.

‘저번처럼 바보같이 질질 짜면 안 돼.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지. 반이 앞에서 또 한 번 무너지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

심호흡 세 번. 그리고 세 번의 노크. 보건 선생님의 들어와도 좋다는 사인 후 건이는 차분하게 문을 열었다.

“선생님. 반이는...?”

“응. 간단히 체크해 봤는데 호흡이랑 맥박이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어. 일시적인 스트레스로 정신을 잠깐 잃었던 것 같아. 지금은 의식도 돌아왔는데, 조금 쉬다가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봐야 할 것 같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고생하셨어요.”

“뭘. 원래 내가 해야 하는 일인데. 어서 가 봐. 너 기다린다.”

“네.”

건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반이가 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해쓱한 얼굴로 반이는 힘겹게 웃으며 건이를 맞이했다.

“자기 왔어?”

“왜 이래...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

“모르겠어. 나도 당황스럽네.”

“병원에 꼭 가봐야겠다. 같이 가자.”

“응. 나 무서워.”

“...말투는 하나도 안 무서워 보이는데.”

“극 T라서 그래. 지금 진짜 극도로 무섭거든. 빨리 손잡아 줘.”

건이는 반이의 손을 꼭 잡았다. 매일 잡던 손인데 기분 탓인지 오늘은 유독 더 야윈 것 같았다.

“커피 줄여. 아무도 너한테 서울대 가라고 안 했어. 제발 쉬엄쉬엄 해.”

“아빠 같네.”

“...아버지 보고 싶어?”

“당연하지. 아빠 살아 있었어도 똑같이 말해줬을 텐데.”

“내가 하잖아, 지금.”

“그러게... 다행이다. 건이가 있어서.”

그리고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손을 잡은 채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뒤늦게 교실로 돌아온 건이에게 윤수는 걱정스런 눈길로 물었다.

“괜찮대? 뭐... 심각하대?”

“아니야. 일단은... 의식은 돌아왔고. 오늘 학교 끝나고 병원에 같이 가 봐야지.”

윤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건이를 위로했다.

‘새끼, 말은 그렇게 해도 확실히 친구는 친구네.’

“차건. 너 이젠 다시는 학교 재미없단 소리는 못하겠다야.”

윤수의 너스레에 건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이 안 되네. 학교 재미없다는 말 취소. 완전 취소.”



“...네?”

“임신했다고. 네 여자친구. 3주 됐네.”

의사 선생님은 무심하게 말했지만, 건이와 반이의 머릿속은 심하게 요동쳤다. 평소에 그렇게 침착하던 반이도 이번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손이 벌벌 떨리는 게 옆에 앉은 건이에게도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근데 밥도 안 챙겨먹고 잠도 안 자고 내리 커피만 들이부으니까 몸이 버텨? 애 안 떨어진 것만 해도 기적이다, 기적.”

“서, 선생님... 저... 오진일 가능성은...?”

“이 자식이 나를 뭘로 보고... 이봐! 이래 봬도 나 산부인과 17년 차야. 초음파 사진 한두 번 봐? 딴소리 말고 애 낳으려면 이제부터 네 여자친구 신주단지 모시듯 모셔. 책임져야 할 거 아냐.”

“아, 네, 네. 당연하죠...”

건이는 반이의 떨리는 손을 꼭 잡았다. ‘내가 지켜줄게. 너도, 우리 아이도.’



건이는 밥 잘 챙겨먹으라는 말과 잠 많이 자 두라는 말을 수십 번 반복하고, 기어이 반이가 꽥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반이를 집으로 들여보냈다. 혼자 남겨진 건이는 막막했다. 이제 이 사실을 어떻게 알릴까부터 시작해서 반이 학교는 어떻게 계속 다녀야 할 것이며 서울대는 어떻게 할 것이며 기타 등등... 그렇잖아도 그다지 기민하지 못한 건이의 머릿속이 엉킬 대로 엉켜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일단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반이 엄마가 이 사실을 알면 나는 죽은 목숨이다.’

건이는 머리를 감싸 쥐고 깊은 고민에 휩싸였다. 이럴 때 찾아가야 할 유일한 사람이 떠올랐다.

‘형... 나 좀 구해 줘.’



윤이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고, 건이는 마치 처분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형 앞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어떡해, 형? 나 무서워.”

“그 정도 깡도 없이 일부터 저질렀냐, 이 자식아?”

“아니... 그 동안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시끄러, 임마! 궁금하지도, 더 듣고 싶지도 않아. 일단 생각부터 하자.”

윤이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낳을... 거지?”

건이는 발끈하며 외쳤다.

“당연하지!”

“...됐어. 그 정도 각오라면. 대신, 너희에게 쏟아지는 모든 상황을 좋건 싫건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감당해야 할 거야. 자신 있어?”

“...잘 모르겠지만, 해낼 거야. 할 수 있어.”

“모르면 용감한 법이지.”

그렇게 말하고 윤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곤 건이의 손을 잡고 아래채로 내려가 부모님의 방문을 두드렸다.

“연세가 적지 않으시니 119를 불러두는 게 좋지 않을까?”

“아직 그 정도는 아냐, 임마.”

“들어와.”

건이는 울상을 지으며 자기 목을 긋는 시늉을 했고, 윤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문을 열고는 얼른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조금씩 건이는 아빠가 될 준비를 시작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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