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척준의 중대발표

by Charles Walker

“결국 그렇게 됐구나.”

반이는 딸기 스무디를 빨대도 없이 들이키며 윤수의 말에 고개를 연신 주억거렸다.

“넌 모든 걸 다 예상한 것처럼 군다.”

“아니 뭐, 꼭 그렇다기보단... 여러 가능성들을 열어놓고 있는 거지.”

“무서운 년.”

“뭘 또 그렇게까지.”

반이는 짐짓 밝게 웃어 보이며 손사래를 쳤다.

“1등 했다며? 늦게 들었다. 축하해.”

“뭘. 고작 2학년 1학기 기말고사 한 번 1등 한 건데.”

“그것도 못해서 빌빌대는 꼴통 두 명을 알잖냐.”

“못하는 거냐? 안 하는 거지. 니들이 머리가 없냐, 뭐가 없냐. 노력을 안 해서 그런 거야.”

“아무리 노력해도 1등은 남의 세계거든.”

“그런가...”

반이는 또 한 모금 마시며 카페 창밖을 바라보았다. 밖에는 운치 있게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가 투둑, 투둑 기분 좋은 리듬을 만들어낸다. 반이가 말을 잇는다.

“자퇴생 여자친구... 돌보기 쉽지 않을 텐데. 괜찮겠어?”

“지금 누구 걱정을 하는 거냐. 6년째 제자리걸음만 하면서 고딩인 척하는 초딩 남친이랑 사는 너보단 나을 거다. 아마도.”

“...독해졌네, 채윤수.”

“누구 덕분에.”

반이는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딸기 스무디를 끝까지 호로록 마시고는 물었다.

“난주는 아마 나 보기 불편해서 못 나온 거?”

“그런 것도 없진 않겠지만... 아직 몸이 좀 안 좋아. 집에서 쉬고 싶대. 그렇잖아도 얼른 들어가 봐야 해.”

“알았어. 그럼 얼른 가. 잘 돌봐 줘.”

“그래. 방학 끝나고 보자.”

반이는 황급히 돌아서서 카페를 나서는 윤수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짜식. 좋아 보이네.”

그때 울리는 전화. 건이다.

“자기. 좋은 아침.”

<일찍 일어났네? 밖이야?>

“응. 카페야. 산책 나온 김에 목 좀 축이려고.”

<나한테 연락하지.>

“잘까 봐. 방해하기 싫어서.”

<기다릴래? 나 30분이면 가.>

“그럼 여기 말고 배구부실에서 봐. 준이 선배 오늘 중요 발표한대.”

<진짜? 알았어. 나 금방 준비해서 갈게!>

해맑게 들뜬 목소리가 쟁쟁 기분 좋게 울린다. 맹추 같은 건이는 이런 맑은 매력이 있다. 초딩 남친이라 했겠다. 어디 누가 더 잘 사나 두고 보자, 채윤수.



오전 11시 30분. 한얼고 배구부실. 분위기는 매우 엄숙.

“...선배, 왜 이렇게 뜸을 들여요. 답답해 죽겠어요.”

“아, 이게 의도치 않게 분위기가 너무 엄숙한데... 뭘 이렇게 사람들을 많이 모았어.”

“모은 것도 아녜요. 그냥 원래 멤버들만 연락해서 모은 건데요, 뭘.”

그렇다. 준이는 반이에게만 살짝 말하고 싶었던 건데, 반이는 건이를 포함해서 분식과 치킨을 함께 먹은 배구부원들까지도 싹 모아서 이 자리에 앉혀놓은 것이다. 본래의 의도와 달라진 분위기에 그만, 척하면 척준도 얼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정말 별 얘기 아니니까, 다들 제발 비웃지만 말아 줘. 알았지?”

“알았으니까 빨리 얘기해요, 형. 시간 끌수록 재미없어요!”

“그래. 그래! 말할게. 나... 대학 가기로 했어!”

반이는 예상했다는 듯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고, 건이는 준이가 무슨 말을 하든 놀란 토끼 눈을 했을 것이므로 패스. 나머지 배구부원들이 꽤나 충격을 받았다. 그중 준이와 절친한 동기인 태경이 대표로 물었다.

“선수 스카웃 기회인데, 이대로 날린다고? 후회 안 하겠어?”

“물론 아깝지. 내 인생에 다시 못 올 기회였을 거야. 하지만 반이의 말을 계속 되뇌었어. 내가 배구를 왜 하는지. 그것만 계속 생각했거든.”

“답은 내렸어요?”

“응. 간단해. 난 배구가 좋아서 하는 거야. 다른 미사여구를 아무리 갖다 붙여도 ‘좋아서’라는 이유 말고는 설명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지금 섣불리 선수로 나간다면 필요 이상으로 내가 소모될 것 같았고, 그렇게 되면 배구를 더 이상 지금처럼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았어. 결국 난 더 배워야 하고, 더 많은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 그래야 오래오래 배구를 좋아하며 살 수 있을 테니까.”

준이가 조심스레 짚어가며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특히 함께 배구를 연습하던 동기들과 후배에게는 유난히 그 울림이 깊었는지, 후배는 남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태경이 대표로 말했다.

“자, 우리 친구이자 선배, 척하면 척, 척준에게 응원의 박수가 필요하지 않을까?”

모두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준이는 자신의 진로 계획 발표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준이의 얼굴에도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쨍그랑!

무지막지한 파열음과 함께 그릇 파편이 사방에 날렸다. 난주가 손에 잡히는 대로 그릇과 컵을 벽에 집어던지고 있다. 윤수는 이래라저래라 말도 없이 묵묵히 그 파편들을 쓸어 담느라 여념이 없다.

“그거 다 던지고 나면 깨지지 않는 걸로 컵이랑 그릇 다 바꿀 거야.”

“그럼 깨질 때까지 던질 거야.”

“그러든지.”

난주는 질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가라고 좀! 나 혼자 있을 수 있다고. 너 같은 거 없어도 돼!”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좀 마.”

“있잖아. 나 정말 너 사랑하거든? 근데 동시에 미워 죽을 것 같기도 해! 널 보면 내가 미친년 같다니까? 그러니까 그냥 내 눈앞에서 사라져 줘. 안 뒈질 테니까. 잘 살 테니까! 그냥 꺼져. 응? 제발 부탁이야.”

“아냐, 넌 나 없으면 또... 그럴 거야.”

난주는 그 자리에서 차마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이미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쩌면 그릇 던지기라도 할 수 있기에. 말없이 수습해 주는 윤수가 있기에 지금껏 버티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미쳐 날뛰는 듯한 이 심리를, 이 정신병을 도대체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건지 난주는 그 방법을 몰랐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윤수는 난주의 어깨를 부여잡고 있었다.

“난주야. 날 봐.”

난주가 자세히 보니 이미 윤수는 사람 꼴이 아니었다. 자신이 던진 그릇 파편에 긁히고 박혀 살이 드러난 곳 여기저기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야, 채윤수. 너...”

“여러 말 말고, 내 눈만 봐. 다른 데 말고.”

“이 상처...”

“정난주!”

난데없는 고성에 난주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꼼짝없이 난주는 윤수의 눈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눈에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슬픔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남몰래 꽁꽁 숨겨 둔 윤수만의 비밀. 그 비밀이 그 깊은 눈동자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난주의 눈에서도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널 아프게 한 거 알아. 날 보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것도 알아. 이렇게 날 다치게 해도 난 아무 상관 없어. 내가 네 마음에 한 짓을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냐. 기꺼이 견딜게. 다 받을게. 그러니까 떠나라고만 하지 말아 줘. 나에게도... 갚을 기회라는 걸 좀 주라. 제발...”

그렇게 말하고 윤수는 무너져 내리듯 꿇어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그걸 보는 난주의 가슴은 미어지는 것 같았다. 난주는 자신도 모르게 윤수 앞에 마주 꿇어앉아 울음으로 들썩이는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 윤수야. 아프게 해서 미안해...”

난주는 윤수의 등을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 되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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