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적 세련미를 사운드로 구축한 천재 작곡가
왼쪽부터 정규 11집 [City Breeze & Love Song] (2021), 4집 [Who Stepped On It?] (1995), 8집 [...그리고 김현철] (2002), 1집 [김현철 Vol.1] (1989), 3집 [횡계에서 돌아오는 저녁] (1993), 10집 [돛] (2019), 2집 [32℃ 여름] (1992)이다.
한국에서 '시티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을 말하라고 하면 단연코 '김현철'일 것이다. 김현철은 재즈에 기반하면서도 난해하지 않고 산뜻하고 깔끔한 음악을 만들어 왔다. 그것은 그가 무려 스무 살의 나이로 정규 1집 [김현철 Vol.1]을 발표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지켜온 원칙으로 보인다. 분명 어려운 화성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전혀 피로하게 들리질 않는다. 천재성과 대중성을 균형감 있게 버무리면 이런 형태가 되는구나, 싶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1집을 명반으로 꼽는 만큼, 나도 이 앨범을 굉장히 좋아한다. 특히 앨범의 문을 여는 '오랜만에'는 어렸을 때 엄청나게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그땐 고작 네 살배기 어린애였는데, 왜 그런지 이 음악이 너무 좋아서 몇 번을 반복해서 틀어 달라고 했었다. 모르긴 해도 아마 테이프가 다 늘어졌을 것이다. 그때 기억이 아직 살아있는 덕에 '오랜만에'는 지금까지도 김현철 노래 중에 나의 최애곡이 되어 있다.
네 살 시절에는 그럴 수 없었겠지만, 지금은 '오랜만에'가 왜 좋은지 대강은 말할 수 있다. 일단 곡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희망차다. 그리고 인트로의 그 퍼커션 소리가 정말 듣기 좋다(네 살배기 시절에 이 소리에 끌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또한 '시티팝'의 귀재답게 도회적 세련미가 곡에 가득 차 있다. 거기에다 후렴에서는 장필순의 명품 코러스까지 아련한 느낌을 더한다. 한 마디로 '깔끔하다'. 내가 좋아하는 요소가 한꺼번에 모조리 들어 있는데도 조잡하지 않다.
물론 1집에는 '오랜만에' 말고도 '춘천 가는 기차', '동네' 같은 대표곡들이 있고, '눈이 오는 날이면', '비가 와' 같은 숨은 명곡들도 많다. 명반으로 손꼽힐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하지만 김현철의 다른 앨범들은 1집만큼 크게 회자되지 못하는 것 같다. 히트곡이 부재했던 2집 앨범이 대표적이다.
1집과 2집 사이에 김현철은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큰 교통사고를 당했었다고 한다. 그 사고 이후 몸을 회복한 뒤 내놓은 2집 앨범은 1집과는 달리 실험 정신이 가득 담겨 있었다. 타이틀곡 '32℃ 여름'은 라틴 재즈의 성격이 강했고, 점층적으로 가사를 쌓아올리는 도입부가 인상적인 '그런대로'는 어두운 분위기의 도입부와 밝은 분위기의 후렴을 극반전시키는 과감한 구성을 시도하기도 했다. 1집에서는 미처 보여주지 못한 스탠더드 재즈를 시도한 '연습실에서'나 아련한 감성을 자극하는 '사과나무' 같은 트랙도 빛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한다.
히트곡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지, 김현철은 다음 앨범에서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고려하여 음악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바로 3집의 타이틀곡 '달의 몰락'이었다. 비지스(Bee Gees) 스타일의 바이브레이션(저 이쁜 다-하-하-할- 하는 식)을 도입하는 등 가창 스타일에도 다양성을 꾀했다. 들을 만한 재미가 있는 곡이었기에, 이 곡은 꽤 큰 성공을 거두었다.
김현철의 성공 신화는 다음 앨범인 4집 [Who Stepped On It?]에서도 이어졌다. 이 앨범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곡은 '왜 그래'로, 김현철의 시그니처인 '시티팝' 분위기가 가장 많이 엿보이는 곡이다. 토라진 연인에게 귀엽게 투정하는 노랫말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밖에도 '나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발라드도 소소하게 화제를 모은 곡이다.
5집 '일생을', 6집 '거짓말도 보여요', 7집 '연애'까지 발표하며 커리어를 이어가던 중, 2002년이 되자 김현철은 새로운 형태의 앨범을 만들기로 한다. 앨범 제목은 [...그리고 김현철]. 즉 앨범의 모든 곡을 듀엣으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 앨범에는 애즈원, 박효신, 롤러코스터, 박완규, 지영선, 옥주현, 김광진, 봄여름가을겨울 등이 힘을 보태며 김현철 음악 세계의 다채로운 매력을 맘껏 드러냈다. 타이틀곡은 유일하게 김현철 혼자 부른 1번 트랙인 'Loving You'인데, 재미있는 건 이 곡에도 'feat. 김현철'이 붙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남자, 컨셉트에 진심이었다.
9집 '결혼도 못하고'를 발표한 이후 김현철은 매너리즘에 빠져 한동안 음악에서 멀어져 있었다. 10집 [돛]으로 돌아오기 전 그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에는 음악 작업이 하나도 재밌지 않았다고 했다. 누구나 그런 시기가 있을 수 있다. 특히 김현철처럼 무대보다 스튜디오를 즐기는 작곡가형 가수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싱어송라이터라고 해도 무대에 서는 가수가 좋은 쪽과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가 좋은 쪽으로 나뉘지 않겠는가. 김현철은 명백히 후자일 것이다. 매번 앨범을 만들고 나면 마치 발표회처럼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 어쩌면 부담이었을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음악 씬을 떠난 지 10년이 넘은 2019년, 새롭게 발표한 정규 10집 [돛]도 많은 후배 가수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다.
앨범 [돛]은 무려 시인과 촌장의 원곡 '푸른 돛'이 인트로로 수록되어 있다. 시인과 촌장의 원곡은 단촐하고 무심하게 툭 던지는 듯한 매력이 있다면, 김현철 버전은 웅장하다. 취향 차이겠지만 나는 원곡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수록곡의 대부분은 박원, 백지영, 밴드 새소년의 황소윤, 박정현, 마마무의 휘인, 화사 등의 후배 가수들이 가창에 힘을 보태주었는데, 나는 김현철이 직접 부른 트랙인 '그 여름을 기억해'가 참 좋았다. 김현철이 도회적 세련미만 잘 표현하는 게 아니다. 그의 음악이 갖는 또 다른 주요한 특성 중 하나는 '노스탤지어'이다. '그 여름을 기억해'를 들으면 어린 시절 어느 여름날의 아름다운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누군가와 함께 부른 곡 중에서 좋은 곡을 택하라면 단연코 죠지와 함께 부른 'Drive'를 반드시 꼽아야 한다. 'Drive'는 제목처럼 완전 드라이브 BGM이다. 운전하면서 들으면 도로와 주변 풍광이 한껏 산뜻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대신 밀리지 않는 도로여야 한다.).
11집 [City Breeze & Love Song]은 김현철이 가장 잘하는 '시티팝'으로 전곡을 채운 앨범이다. 앨범의 트랙 수는 많지 않지만, 김현철 음악의 중대한 축인 시티팝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니 들어보기를 권한다.
요즘 의도치 않게 글이 자꾸 길어지는 것 같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음악과 '잘 이별하기 위해서'이다. 도저히 쿨하게 이별할 순 없을 것 같아서, 지리하게 바짓가랑이 붙잡는 심정으로 쓰는 글이다. 그러니까 미련이 그득그득 묻어서 글이 자꾸 길어지는 모양이다. 자꾸 할 말이 많아지는 거다. 이 말도 하고 싶고, 저 말도 하고 싶고, 이 말은 꼭 해야 하는데, 놓치면 안 되는데 싶어서. 아마 앞으로도 이렇게 긴 글을 쓸 일이 많아질 것 같아서 미리 덧붙이는 사족이다. 차마 이런 내 미련까지 사랑해 달라고는 할 수 없다. 그저 바라만 봐 주셔도 감사할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