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얼

신비주의 혹은 장인정신 그 사이 어딘가

by Charles Walker
나얼이 발표한 다수의 앨범들.

왼쪽부터 리메이크 앨범 [Back To The Soul Flight] (2005), 솔로 정규 1집 [Principle Of My Soul] (2012), 싱글 [Soul Pop City] (2023), [Soul Pop City (Part 2)] (2023), [Soul Pop City (Part 3)] (2024), 솔로 정규 2집 [Sound Doctrine] (2018), 싱글 [같은 시간 속의 너] (2015), [나얼 Ballad Pop City] (2023), [서로를 위한 것] (2020), 브라운 아이드 소울 정규 3집 [Browneyed Soul] (2010), 4집 [Soul Cooke] (2015), 1집 [Soul Free] (2003), 5집 [Soul Tricycle] (2025), 2집 [The Wind, The Sea, The Rain] (2007), 브라운 아이즈 정규 1집 [Brown Eyes] (2001), 2집 [Reason 4 Breathing?] (2002), 3집 [Two Things Needed For The Same Purpose And 5 Objects] (2008), 앤썸 정규 1집 [ANTHEM] (1999)이다. (헥헥...)


나얼은 1999년, 4인조 R&B 그룹 '앤썸'으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이때는 방송 출연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었는지 무대 영상도 존재한다. 하지만 당시 방송계의 행태(구체적인 부분은 알 수 없음)에 환멸을 느낀 그는 외부 노출을 극도로 꺼리며 2025년 현재까지도 신비주의를 고수하게 된다. 앤썸은 흥행에 실패하며 해체되었고, 당시 팀(TEAM)이라는 그룹에서 작곡을 담당하며 '별'이라는 곡으로 소폭의 히트를 기록하고, 채리나가 소속되었던 디바(Diva) 등의 그룹에 다수의 곡을 써 주기도 한 멤버인 양창익이 나얼의 존재를 주목하고 있었다. 이내 팀(TEAM)도 해체 수순을 밟았고, 양창익은 활동명을 '윤건'으로 바꾸며 나얼과 함께 음악을 해보자고 제안한다. 나얼이 이를 수락하며 결성된 팀이 바로 전설의 브라운 아이즈(Brown Eyes)이다.


2001년 발표된 브라운 아이즈의 1집 '벌써 일년'은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기록했다. 윤건이 만들어낸 미디움 템포의 몽글몽글한 사운드 위에 얹힌 나얼의 명품 보컬은 화학적이라고밖엔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시너지를 냈다. 이후에 발표한 후속곡 'With Coffee'까지 흥행 가도를 이어가며 브라운 아이즈는 그 흔한 방송 활동 한 번 없이도 차트 상위권을 계속 유지하였다. 이 앨범에는 '그녀가 나를 보네', 'Love Is Over', '언제나 그랬죠'를 비롯하여 나얼이 직접 곡을 만든 'No Day But Today' 등을 주목할 만하다.


그 이듬해 발표한 2집 [Reason 4 Breathing?]은 훨씬 더 균형 잡힌 구성과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명반이었다. 타이틀곡은 '점점'이었으나, 타이틀곡만 사랑받은 것이 아닌 앨범 전곡이 골고루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쓸쓸한 분위기의 어쿠스틱 발라드 '비오는 압구정', 전원석의 곡을 리메이크한 '떠나지마', 나얼이 곡을 쓰고 솔로로 부른 R&B 발라드 'True Luv', 후속곡이자 나얼의 신 들린 애드리브를 만끽할 수 있는 'For You' 등 이 앨범 또한 들을거리가 풍성하다.


하지만 2집 앨범을 만들 당시 두 멤버 간의 음악적 견해 차이가 도드라졌고, 결국 이 앨범까지만 함께하기로 한 뒤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걷는다. 나얼은 오랫동안 꿈꿔 왔던 R&B 중창단에 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멤버를 모았고, 그렇게 정엽, 영준, 성훈의 세 사람이 뜻을 같이하여 결성된 팀이 현재까지 나얼의 울타리가 되어 주는 브라운 아이드 소울(Brown Eyed Soul)이다.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정규 1집 [Soul Free]는 브라운 아이즈가 해체한 이듬해 바로 발표되었다. 그 말인즉슨, 브라운 아이즈 작업을 하면서 나얼은 틈틈이 자신만의 길을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이미 완성형 보컬이었던 나얼에 비해 나머지 세 명의 멤버들이 아직 준비가 덜 된 느낌이 이 앨범에서 문득문득 나타난다. 특히 영준의 경우 다듬어지지 않은 느낌이 강한데, 이후에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깜짝 놀랄 정도이다.


그래도 급하게 만든 앨범치고는 완성도가 상당하다. 박근태가 작곡한 타이틀곡 '정말 사랑했을까'는 차치하더라도, 멤버들의 화음이 가장 아름답게 표현된 곡인 'My Everything', 나얼 혼자만 높은 키로 부른 독특한 구성의 'Go', 우울한 분위기의 R&B 'Blue Day'는 브라운 아이드 소울이 앞으로 가고자 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R&B 곡들이다. 또한 바비 칼드웰(Bobby Caldwell)의 명곡 'What You Won't Do For Love'를 샘플링한 힙합 트랙 'Candy'에는 다이나믹 듀오(Dynamic Duo)가 피쳐링하였고, 아소토 유니온(Asoto Union)의 연주와 함께한 네오 소울 트랙 '술'과 같이 정통 흑인음악을 향한 지향성도 드러낸 곡도 있다.


브라운 아이드 소울 1집을 녹음하면서 나얼 또한 느꼈으리라. 멤버들에게 농익을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래서였을까. 2005년, 나얼은 멤버들의 참여를 최소화한 스페셜 앨범 [Back To The Soul Flight]을 발표한다. 이 앨범은 전곡 리메이크로 구성되어 있고, 브라운 아이드 소울 멤버들과 함께 부른 곡은 '그대 떠난 뒤(원곡 빛과 소금)', 'Ribbon In The Sky (원곡 Stevie Wonder)', '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도다 (원곡 찬송가)'의 세 곡이다. 앨범의 타이틀곡은 박선주 원곡의 '귀로'로, 아주 많은 사랑을 받았고 '언젠가는 (원곡 이상은)', '호랑나비 (원곡 김흥국)', '한 번만 더 (원곡 박성신)' 등도 뛰어난 가창력으로 호평을 받았다.


드디어 팀의 정비가 끝났다고 판단했는지 2007년에 드디어 야심차게 준비한 2집 [The Wind, The Sea, The Rain]을 발표하는데, 이 앨범은 두고두고 브라운 아이드 소울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반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나얼 가창력의 최고 전성기도 이 즈음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나머지 멤버들의 음악적 역량 또한 이때쯤 완전히 완성되어 이제서야 비로소 진정한 '팀'으로 거듭났다는 느낌이 든다. 타이틀곡은 'My Story'이며, 자신에게 엄격하기로 소문난 나얼이 '이 곡만큼은 잘 부른 것 같다'라고 평가할 만큼 완성도가 높다. 이 앨범에는 'Because Of You', 'Promise You', '그런 사람이기를'과 같은 R&B 발라드를 비롯하여, '추억 사랑만큼 (영준 & 강현정(버블시스터즈) 듀엣곡)', 'Round & Round (성훈 솔로)', 'Nothing Better (정엽 솔로)', '기다려요 (나얼 솔로)' 등 멤버들의 개성을 나타낼 수 있는 솔로곡들까지 수록되어 듣는 재미를 한껏 선사한다.


하지만 2집에서의 압권은 단연 마지막 트랙 '폭풍속의 주'이다. 흔히 '하나님 버프'라고 부르는데, 나얼이 가스펠을 부르면 다른 자아로 갈아끼워지는 듯하다. 후반부에 휘몰아치는 엄청난 애드리브를 꼭 들어보라. 참고로 나는 무종교인이지만,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이런 게 영성인가, 이런 게 진심인가 싶어서.


2008년에는 모두가 깜짝 놀랄 소식이 전해진다. 바로 브라운 아이즈가 새로운 앨범을 발표했다는 사실. 정규 3집으로 불리는 이 앨범은 나얼과 윤건이 '이쯤엔 그냥 같이 한 번 해 보면 재밌겠다' 싶어서 프로젝트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타이틀곡은 '가지마 가지마'였고, 역시 큰 인기를 얻었다. 여담이지만 이 앨범을 들을 땐 군대병장 때였는데, 생활관을 청소하면서 흥을 돋우기 위해 내가 자주 틀어주었던 곡이 이 앨범의 'Summer Passion'이었다(후임들은 싫어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와서 좀 미안...). 매우 신나는 곡이니 여름에 드라이브하며 꼭 들어보길 바람. 이때 나얼의 가창력은 끝을 모르고 진화하는 듯하다.


2010년에는 브라운 아이드 소울 정규 3집이 나온다. 팀 이름을 내걸고 발표하는 앨범인 만큼, 2집의 높은 완성도를 거의 그대로 이어간다. 타이틀곡은 다소 평범한 느낌의 '똑같다면'이었지만, 선공개했던 곡들인 '비켜줄께', 'Love Ballad', 'Can't Stop Lovin' You'가 오히려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12년에는 순수 창작곡으로만 채워진 나얼의 솔로 정규 1집이 발표된다. 타이틀곡은 그 유명한 '바람기억'이다. 이 곡에는 녹음 비하인드가 있는데, 나얼은 곡의 후반부에서 자신이 원래 음보다 반음 정도 높게 불러서 녹음했음을 인지했으나 그때의 느낌이 오히려 더 좋아서 녹음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수록했다고 한다. 녹음은 한 번 하고 나면 그것이 오리지널이 되고 평생 남기 때문에 신중하게 몇 번이고 수정한다고 말하는 완벽주의자인 나얼이 자신에게 이토록 관대할(?) 수도 있다니. 역시 사람이란 단순하지 않아.


브라운 아이드 소울 4집 발표까지는 조금 오랜 공백기를 가졌다. 아마도 음악 작업에 만전을 기하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만큼 4집 [Soul Cooke]는 2집의 퀄리티를 방불케 하는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밤의 멜로디'와 'Home'의 더블 타이틀로 활동했으며, 선공개했던 '너를', 'Pass Me By', 'Always Be There' 등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브라운 아이드 소울 4집 이후로는 '같은 시간 속의 너', '기억의 빈자리' 등 솔로 음원들을 싱글로 발표하며 솔로 행보를 준비하였고, 2018년에는 '널 부르는 밤'을 타이틀곡으로 한 솔로 정규 2집 [Sound Doctrine]을 발표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히트 레코드에 속하는 솔로 1집보다는, 상대적으로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한 이 솔로 2집을 훨씬, 한 백만 배 정도 더 좋아한다. 이유는 단 하나다. 앨범에서 버릴 곡이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특히 피아노와 소프라노 색소폰으로 이루어진 'Blue Wing'이나 도회적인 세련미가 물씬 풍기는 'Heaven'은 무조건 추천이다.


솔로 2집의 리메이크 곡인 'Gloria'를 수록하기 위한 비화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원곡자인 인챈트먼트(Enchantment)는 리메이크를 허가해 주지 않기로 유명한 팀이었는데, 나얼이 부른 데모를 들어보고는 깜짝 놀라며 곧장 리메이크를 허락했다고 한다. 헌데 이 지점에서 궁금한 점이 하나 생겼다. 1997년, 제시 파웰(Jesse Powell)의 1집에도 'Gloria'가 실려 있단 말이다. 이 리메이크는 허락을 받았을까? 이것도 무척 잘 부르긴 했는데 이때도 원곡자들이 깜짝 놀랐을까? 아니면 제시 파웰은 자국민이자 같은 흑인 가수라서 괜찮고, 나얼의 경우는 동양인이 이 정도 부른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서 허락해 준 건가? 원곡자의 속내가 무척 궁금하다.


솔로 2집 이후에는 다수의 싱글을 간간이 발표하며 가볍게 활동하였고, 역류성 식도염으로 인해 성대가 손상되어 한동안 노래를 할 수 없는 시기도 겪었다. 또한 멤버 중 한 명인 성훈이 팀을 탈퇴하는 해프닝까지 발생하였다. 나얼에게는 여러모로 파란만장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올해인 2025년, 브라운 아이드 소울은 3인조 체제로 정규 5집 [Soul Tricycle]을 발표한다. 타이틀곡은 '우리들의 순간'. 나얼의 설명에 의하면 '되돌릴 수 없는 나날들'을 노래한 곡으로 뮤직비디오와 함께 감상한다면 '짠한' 정서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오랜만에 나온 만큼 앨범을 잘 만들어냈다. 하지만 가끔 성훈의 목소리가 들어간 트랙도 함께 섞여 있어서 기분이 오묘하다.


나얼의 긴 역사를 한 편의 글로 정리하자니 압도적으로 긴 글이 되어버렸다. 뒤로가기를 누르지 않고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존경을 표한다. 사실 나에게 나얼은 '애증'의 가수이다. 너무도 내 취향에 완벽하게 들어맞도록 노래하지만, 가끔 노출되는 그의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종교적 지향이나 신비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주변인들이 그의 눈치를 보게 만드는 모습(특히 팀원인 정엽, 영준에게서 그런 모습이 많이 보인다) 등이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워하려고 해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 때문에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는 가수이다. 그래서 나얼의 노래를 들으면 가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날 때도 있다. 별 수 있나.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예술적으로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라면 기꺼이 향유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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