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피아노의 무드를 만든 진정한 장인(丈人)
왼쪽부터 앨범 [Interplay] (1963), [Portrait In Jazz] (1960),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 (1961), [Undercurrent] (1962), [Waltz For Debby] (1962)이다.
빌 에반스(Bill Evans)의 피아노 연주를 정말 좋아한다. 그것이 빌 에반스의 연주라는 것을 알기 전부터 그의 연주를 좋아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재즈 피아노 연주를 정말 좋아했다. 일반 대중가요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는 독특한 화성, 기승전결도 없이 무심하게 흘러가는 비선형적 전개, 다른 악기들에게 가끔 자리를 내어줄 때의 넉넉한 여백의 미까지 어느 하나 좋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이렇게 좋은 연주를 하는 사람이 누군가 하고 찾아봤더니 빌 에반스였던 것뿐이다.
재즈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쿨 재즈(Cool Jazz)라는 대목이 나올 때가 있다. 쿨 재즈가 도래하기 전에는 누가 '잘 달리나'를 경주하듯 화려하고 빠른 연주를 선보였다. 이때가 비밥 시대인데, 찰리 파커(Charlie Parker),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등이 날아다니던 시절이다. 이런 핫(hot)하기만 한 연주에 염증을 느낀 이가 있었으니, 바로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되시겠다.
내가 느낀 마일스 데이비스는 정말 싫증을 잘 내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재즈 판을 손바닥 뒤집듯 자주 뒤집어가며 혁신가로 손꼽힐 수 있었던 거겠지만. 어쨌든 그가 비밥 시대를 종언하고 제창한 장르가 바로 쿨 재즈였던 것. 그 앨범의 이름은 무려 [Birth Of The Cool] (1957)이었다.
마일스 데이비스와 쿨 재즈 이야기를 너무 오래 한다 싶다. 하지만 빌 에반스 이야기를 하면서 쿨 재즈를 제대로 언급하지 않으면 도저히 내실 있는 글을 쓸 수가 없을 것만 같다. 왜냐하면, 내가 느끼기엔 마일스 데이비스가 쿨 재즈의 어법을 창제한 사람이라면 빌 에반스는 그 어법을 동시대의 그 누구보다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해 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절제된 무드에서 느껴지는 품위는 쿨 재즈가 지향해야 할 미덕인 것 같았다.
빌 에반스는 개인적인 아픔도 많이 겪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빌 에반스 트리오'로 그야말로 날아다니던 시절,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동료인 베이시스트 스콧 라파로(Scott LaFaro)를 교통사고로 잃게 된 일이다. 트리오가 해체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빌 에반스는 이 일로 큰 절망에 빠지게 되었고, 오랜 세월 동안 고통의 나날들을 보내게 된다. 빌 에반스가 1980년에 숨을 거두었는데, 오죽했으면 그때 사람들의 평가가 '역사상 가장 긴 자살'이었을까.
이러한 아픔을 딛고 1962년, 기타리스트 짐 홀(Jim Hall)과 듀엣으로 협연한 [Undercurrent]를 반드시 들어야 한다. 타악기 하나 없이 피아노와 기타만으로 조용한 실내악 재즈를 연주하는데, 무드가 정말 죽여준다. 이렇게 쌀쌀한 아침,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이 앨범을 듣는다면 머릿속이 저절로 환기되며 어떤 일이든 시작할 수 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
반면, 이듬해 발표한 [Interplay]는 빌 에반스 연주 중에서 가장 역동적인 양상을 보인다. 트럼펫에 프레디 허버드(Freddie Hubbard), 베이스에 퍼시 히스(Percy Heath), 기타에 짐 홀, 그리고 빌 에반스 트리오에서 드럼을 맡았던 필리 조 존스(Philly Joe Jones)까지 합세하여 그야말로 신나게 놀아제낀다.
뭐, 사실 아무렴 해도 빌 에반스 트리오 시절에 발표한 앨범들인 [Portrait In Jazz],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 [Waltz For Debby]를 능가할 수 있을까. 참고로 이 중 [Portrait In Jazz]만 스튜디오에서 녹음했고, 나머지 두 앨범은 라이브 실황이다. 빌 에반스가 가장 잘 나갔고,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담겨 있는 앨범들이기 때문에 연주의 퀄리티는 단연 최상이다.
빌 에반스의 생애는 너무도 아팠고 힘들었겠지만, 이런 연주를 들을 수 있게 해 주어서 우리에게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많이 아팠던 만큼, 그곳에서는 스콧 라파로를 다시 만나 못다한 이야기도 마저 하고 즐겁게 연주하며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