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을 결심한 20대와 세상을 떠난 교수가 남긴 마지막 선물
2010년 1월, 시카고의 겨울은 냉혹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헤어 공항에 도착했을 때, 마른 눈발이 얼굴을 때렸다. 영하 20도의 바람은 나의 얇은 겨울 코트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추위가 아니라, 미국 유학이라는 거대한 도전 앞에 선 내 마음의 떨림이기도 했다.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캐리어 하나와 배낭 하나, 그리고 꿈이라는 이름의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나는 낯선 대지를 밟았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생경했다. 영어로 쏟아지는 안내 방송, 각양각색의 사람들, 그리고 영어를 말하는 내 입술의 어색함까지.
시카고 북서부, 사우스배링턴에 위치한 윌로우 크릭 교회. 유학생활 첫 주, 담당 교수의 권유로 찾아간 이곳은 내 예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규모였다. 예배당은 마치 콘서트홀 같았고, 2만 명이 넘는 성도들로 매 주일마다 북적였다.
"왜 한인 교회가 아닌 미국 교회를 선택했나요?"
교회 봉사자가 물었을 때, 나는 잠시 망설였다. 한국어로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는 한인 교회를 두고 이곳을 선택한 것은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었다.
"영어를 더 빨리 배우고 싶어서요... 그리고 진짜 미국을 알고 싶어서요."
그 말을 하는 내 마음 한편에는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과연 내 말이 통할까?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그러나 그 불안은 곧 기대로 바뀌었다. 그곳에서 독거노인 봉사 프로그램을 소개받았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기회라고.
봉사 활동 두 번째 주, 나는 시카고 북부 에반스턴의 한 저택으로 향했다. 조지안 스타일의 붉은 벽돌 건물은 웅장했고, 겨울임에도 정갈하게 관리된 정원은 품위가 넘쳤다. 초인종을 누르자 멀리서 "들어오세요"라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이 펼쳐졌다. 고풍스러운 앤티크 가구들, 벽을 가득 채운 책장들, 그리고 오래된 피아노. 긴 복도를 지나 대서재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녀를 처음 보았다.
캐서린 윌리엄스. 아흔 살의 그녀는 창가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흰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올려져 있었고, 푸른 눈동자는 세월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총명함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두꺼운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자넨가, 새로운 친구는?" 그녀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또렷했다.
"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김재훈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내 어색한 영어에도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 가까이 와서 앉으렴. 난 캐서린이야. 하지만 캣이라고 불러도 좋아."라고 말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금요일에 캐서린을 방문했다. 처음에는 집안일을 돕고 장을 보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하지만 곧 우리의 만남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캐서린은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35년간 영문학을 가르친 교수였다. 셰익스피어와 제인 오스틴, 에밀리 디킨슨에 관한 그녀의 해설은 마치 시를 읊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녀는 내 영어 실력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만드는 문법적 실수마다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해 주었다.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야. 더 좋은 그릇을 가질수록, 더 아름다운 생각을 담을 수 있지."
캐서린의 말에 나는 더욱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다. 그녀는 내 에세이를 꼼꼼히 검토해 주었고, 미국 대학에 편입하기 위한 준비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우리의 대화는 언어 공부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유럽에서 공부하던 시절,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를 도왔던 경험, 노스웨스턴 대학 최초의 여성 정교수가 되기까지의 역경, 남편 로버트와의 50년 결혼생활, 그리고 유일한 아들 마이클을 불의의 사고로 잃은 슬픔까지.
"인생은 기쁨과 슬픔이 수놓은 태피스트리와 같아. 가까이서 보면 실의 매듭과 얽힘이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그것이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이 된단다."
그녀가 들려주는 지혜의 말들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새겨졌다.
봄이 오자 캐서린은 미시간 호수로 나를 데려갔다. 그녀의 휠체어를 밀며 호숫가를 거닐 때, 우리는 끝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유난히 따스했던 4월의 어느 날, 그녀는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은 모두 이 호수와 함께 있어. 로버트와의 첫 데이트, 마이클이 처음 걸음마를 배웠던 날, 그리고 지금... 네가 내 휠체어를 밀어주는 이 순간까지."
그 말에 나는 목이 메었다. 90대의 노교수와 20대의 동양인 유학생. 우리는 너무나 달랐지만, 그 순간만큼은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그해 여름, 캐서린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심장 질환이 심해져 그녀는 병원과 집을 오가게 되었다. 나는 강의와 아르바이트 사이에 틈을 내어 그녀를 방문했다.
7월의 마지막 날, 병원에서 캐서린을 마주했을 때, 그녀는 평소보다 창백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여전했다.
"재훈아, 내가 네게 말해주지 못한 게 있어."
그녀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넌 내게 단순한 봉사자가 아니었어. 넌 내게 마이클을 생각나게 했어. 그 따스한 미소, 그 호기심 어린 눈빛... 네가 온 그날부터, 난 다시 살아있는 기분이었단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메마른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내 심장을 울렸다.
"저도 할머니가 제 할머니 같았어요. 저를 어렸을 때 돌봐주셨던..."
우리는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캐서린이 평화롭게 잠든 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그 순간, 나는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었다. 강의실 한쪽 구석에서 모든 것을 잃은 듯한 느낌으로 흐느꼈다.
캐서린의 장례식은 고요하고 품위 있게 진행되었다. 생전에 그녀가 사랑했던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구절들이 낭독되었고,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온 동료 교수들이 그녀의 학문적 업적을 기렸다.
장례식에서 나는 한 남자를 만났다. 그는 캐서린의 변호사 마이클 스톤이었다. 그는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캐서린 선생님이 당신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장례식 후 저희 사무실로 와주시겠어요?"
그날 오후, 법률 사무소에서 나는 캐서린이 남긴 편지와 유산을 전달받았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친애하는 재훈이에게,
네가 내 삶의 마지막 장에 들어와 줘서 고맙다. 네 덕분에 나는 다시 한번 가르치는 기쁨을 느꼈고, 미래를 향한 희망을 보았다. 이 작은 선물이 네 꿈을 향한 발걸음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네가 원하는 곳에서 더 큰 세상을 만나라.
영원히 네 곁에서,
캐서린"
봉투 안에는 내 대학 학비를 충당할 수 있는 수표가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단순한 금전적 도움이 아니라, 그녀가 내게 보내는 마지막 응원이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나는 종종 미시간 호수를 추억한다. 그곳에서 캐서린과 함께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그녀의 지혜와 사랑을 기억한다.
외로운 유학생과 고독한 노교수의 만남은 우연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만남이 내 인생에 가져온 변화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캐서린은 내게 언어를 넘어 삶의 의미를 가르쳐 준 진정한 스승이었다.
"인생은 태피스트리와 같아..." 그녀의 말이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돈다. 그리고 나는 안다. 내 인생의 태피스트리에서 캐서린과의 추억은 가장 빛나는 실로 수놓아져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