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물든 약속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봄바람이 살랑이던 어느 오후, 나는 오락실에 가기 위해 서둘러 교문을 향해 걸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던 중, 한가운데서 남자아이들 무리에 둘러싸인 여자아이가 보였다. 호기심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지만, 곧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고, 오락실에 빨리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순간, 맞고 있는 여자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내 심장이 얼어붙는 찰나, 그 아이는 바로 내 여동생 유정이었다.
"유정아!"
분노로 머리가 하얘진 나는 이성을 잃고 남자아이들에게 돌진했다. 내 주먹은 이미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두 명이 쓰러졌고, 나머지는 놀라 뒷걸음질 쳤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나는 쓰러진 아이들을 향해 다시 다가갔다. 그때, 두 명이 소리를 지르며 본관 건물 쪽으로 도망쳤다.
"괜찮아?"
동생을 부축하며 살펴보니 얼굴은 온통 눈물과 콧물에 피까지 범벅이 되어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그 작은 얼굴에 담긴 고통이 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그렇게 교문 쪽으로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등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우리 학교에서 '대가리'로 불리는 6학년 형들이 무리를 지어 달려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아까 도망친 아이들도 보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복수를 위해 온 것을 알았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잡아채 학교 건물 뒤, 폐창고로 끌고 갔다. 녹슨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리고, 그곳에서 시작된 폭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주먹과 발이 비처럼 날아들었고, 난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무너졌다. 입에서는 쇠맛이 느껴졌고, 눈앞이 흐려졌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창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생의 울부짖음이 폐창고에 메아리쳤다.
"그만! 제발 그만 때려! 우리 오빠 죽어!"
동생은 그 작은 몸으로 내 몸을 덮었다. 하지만 폭행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도 높은 폭행이 이어졌고, 이윽고 나는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때, 바닥은 온통 내 피로 얼룩져 있었다. 석양이 창고 틈새로 붉게 스며들고 있었다. 동생은 여전히 내 옆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동생의 손을 잡고 힘겹게 일어섰다. 책가방과 신발주머니를 챙기고, 교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문득 발끝에 걸리는 허전함. 실내화 한 짝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얻어맞는 동안 어디론가 굴러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이거... 내가 찾아왔어."
동생이 내 실내화를 내밀었다. 그 순간, 나는 동생의 얼굴에 핀 멍과 상처들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나 때문에 동생이 이런 일을 당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내가 더 강했더라면... 네가 이런 일을 안 당했을 텐데."
동생은 고개를 저었다.
"오빠 없었으면 더 맞았을 거야."
석양을 등지고 집으로 향하는 길,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억울했다. 분하고 원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마음속에서 하나의 결심이 자라났다. 동생의 손을 꼭 쥐며 나는 다짐했다.
'힘을 키워야 한다. 나와 동생을 지키기 위해... 더 강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