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 왜곡에 대한 섭식장애 이야기
그래.
턱살이 있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검색창과 동영상 플랫폼을 서치 하다 보면 턱살 리프팅, 턱살 마사지, 턱살 빼는 법, 턱살 지방흡입, 턱살 보톡스 등 턱살에 관련된 콘텐츠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사진을 찍을 때도 턱살이 나오는 부분만 편집하여 날렵한 라인이 나오도록 한다. 서양의 기준에 맞추어 얼굴크기가 작도록 포샵처리는 기본이며 이중턱을 보이지 않도록 하는 장치들이 날로 새로워지고 있다. 사진과 영상을 찍을 때 어떻게 하면 좀 더 이중턱, 턱살을 보이지 않도록 할까를 생각하며 구도를 잡기도 한다. 턱살이 하나도 없고 날렵한 선을 갖는 것이 사회적 구조와 문화 속에서 당연하게 인간이 추구해야 '미의 기준'으로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현시대의 풍토 속에서 나의 가치를 '턱살'이라는 감옥으로 스스로를 가두고 평가하고 제단하고 있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완전히 턱살의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글을 써서 기록으로 남겨 자신에게 용기를 조금이라도 주고 싶었다.
어린 시절 턱살이 남들보다 좀 복스럽게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초등학교 때까지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그렇게 얘기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외모에 대하여 비중을 두고 있지 않았던 해맑던 시절이어서 그랬던 것일까. 중학생이 되고 '외모'에 대한 관심이 시작이 되면서 친구들보다 조금 턱살이 많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턱살이 있다 보니 다른 사람보다 얼굴 부분에 살이 많아 보였다. 얼굴만 보면 통통해 보이는데, 몸과 다리를 보면 날씬한 체형이니 이상하다고 말이다.
그 말이 언제부턴가 듣기가 싫어서 중3 때부터 운동과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운동을 하고 나면 그 순간만큼은 턱에 살이 빠진 것 같이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부기가 잠시 빠진 것이었는데, 잠깐의 희열이 그렇게도 좋았다. 그 외에도 사진을 찍으면 남들보다 얼굴이 더 동그랗고, 입체적이고 크게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나에게 사진빨이 안 받는다고 했다. 왜 남들보다 크고 넓게 나오는 걸까 심히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울에 비춰보며 걱정하고 또 걱정하였다. 그 당시 내린 결론은 '턱살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 후부터 사진을 찍기가 싫어졌다. 얼굴이 다른 사람보다 크게 나오고 싶지 않았고 웃으면 턱살이 한껏 접혀서 나오는 것, 옆모습을 보면 턱선보다 턱살이 두둑하게 잡히는 것들이 흉해 보였기 때문이다.
턱살이 있는 내 모습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턱살이 쪘나 안 쪘나.' '혹시 쪄보인가 아닌가. 턱살이 잡히고 있나 아닌가. 사람들이 나의 턱살을 봤나 안 봤나.'를 체크했다. 아침부터 눈 뜨자마자 하는 일은 턱과 얼굴에 살이 얼마나 붙었나 거울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누워만 있으면 얼굴에 살이 붙을 것이기 때문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고, 졸린 눈을 비비며 손으로 경락마사지를 했다. '아. 턱살이 왜 이렇게 부은 거지. 일부러 염분 섭취도 하지도 않았는데.' 하며 질책했다. 아침을 가득 채워서 먹고 턱살을 빼기 위해 달리기에 나섰다.
'좀 달리고 나면 얼굴 부기도 빠지고 괜찮아질 거야.'
집 앞에 차들이 즐비해 있다. 차들의 창문 사이로 얼굴을 익숙한 듯 확인했다. 앞과 옆모습을 지나가는 그 짧은 찰나에 파악하였다. 턱살이 어느 정도 나와있나 한번 더 살펴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을 찌푸리고 또 한 번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일부러 어제 먹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더 부은 거야? 마음에 안 들어.'
달리면서도 지나가는 사람들을 모두 스캔하였다. 다른 어떠한 것보다 얼굴에 턱살이 얼마나 있는지를 자동적으로 살펴보았다. '아 저 사람은 몸은 통통한 편인데 어쩜 그리 턱에는 살이 없지?', '얼굴 크기 좀 봐.',
온전히 나에게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나의 원함이 무엇인지, 어떤 선택을 하고 싶은지, 감정과 생각은 어떤지를 볼 겨를이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온통 신경을 쓰느라 정작 제일 중요한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던 것이다.
단체에서 사진이 나올 때마다 두려웠다. 항상 나를 먼저 발견하고 얼굴 크기와 턱살이 잡혔는지 잡히지 않았는지를 먼저 살폈다. 그리고 나처럼 혹시 턱살이 나온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봤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나만큼의 턱살이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비슷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헤매며 찾았다. 길을 걸을 때에도 모든 사람들의 턱부터 봤다. 턱에 살이 있는지 없는지.
어느 순간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사실이 있었다. 얼굴 크기가 커도, 턱에 살이 없는 사람이 있었던 것. 얼굴에 각이 져 사각턱이어도 턱살이 하나도 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체형이 나와는 정 반대인 사람들이 있었다. 몸에는 살이 많은데 얼굴과 턱에는 살이 없고 크기도 작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상반신만 나오고 얼굴을 중심으로 사진을 찍게 되면 마른 사람들처럼 보였다. 뭔가 불공평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체질이 되고 싶었다. 왜 그 체질이 되지 못할까 하며 스스로에게 억장을 부렸던 적이 많다. 그렇다는 것은 나만 이렇게 턱살이 있다는 것인데, 나 같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고 그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큰 이질감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정도까지 턱살이 잡히지 않은데 유독 나만 이런 것 같아서 스스로를 증오했다.
턱살만 빠진다면 뭐든 할 거야.
살을 빼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나에게는 '턱살'을 없애는 것이었다. 살을 뺀다면 턱살 또한 자연스레 빠지겠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물론 허벅지살 종아리 살 팔뚝 살도 포함했지만 제일 신경이 쓰였던 것은 턱살이었다. 칼로리를 극강으로 제한을 하기 시작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친구 한 명이 나에게 "얼굴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 라며 걱정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턱살과 볼살을 빼고 싶었던 나였기에 극도의 절식과 운동을 하면서 살을 빼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어느 날 사진첩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들을 보았다. 대개 다른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얼굴에 살이 빠지고 몸에만 살이 붙는다고 하면서 되려 늙어 보인다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였는데 나는 아닌 것 같았다.
살을 빼야겠다 시작을 하고 42kg까지 처음으로 살을 뺐다. 볼살을 만지며 살이 얼마나 있는지를 확인하고, 턱 부분도 거울로 확인을 했다. 팔과 다리는 현저히 말라 있었다. 그렇지만 얼굴은 생각만큼은 아니었다.
34KG가 되어 기어 다녀야 했던 그 순간이 왔어도 얼굴을 보면 빼야 할 턱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소금도 절식했던 나였기에 나트륨을 배출하는 것이 어려워 조금만 염분 있는 것을 먹은 날엔 하루 종일 턱과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고 겨우 저녁에 잘 때쯤 되어야만 가라앉곤 했다. 날이 지날수록 더 철저하게 염분을 먹지 않았고, 강박적인 운동과 절식은 끊을 수 없는 중독처럼 지속되었다.
존재가 뿌리째 흔들린다는 것은
턱살을 없애기 위해 거식 증적인 행동을 멈출 수 없는 말들이 있었다.
-얼굴 좋아 보인다? 얼굴이 폈네? 요즘 좀 편한가 봐?
-얼굴에 살이 좀 붙었네~ 운동 안 해?
-좀 부어 보이는데?
-살이 좀 올랐네~~. 딱 좋다.
위와 같은 말을 듣는 날이면 비록 '딱 좋다'는 말이 칭찬으로 하는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더 꼬아서 생각을 했다. '뭐야. 그 이상으로 가면 좋지 않다는 거야?' 이런 말을 듣는 날엔 더욱 절식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먹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먹은 것에 대하여 채근질 하고 증오했다.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존재가 뿌리째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 같았다.
턱살 나오는 걸 뭐 그리도 신경 쓰나, 인생이 편해서 별 걱정을 다하는 건가 생각하지만 나처럼 심각한 섭식장애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바로 '존재'로 자리 잡는다. 대개 식이장애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 개념과 자기 확신이 매우 취약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즉, 앞서 설명한 것처럼 자기에 대한 중심을 잡는 존재의 뿌리가 흔들리며, 타인이 나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 곧 정체성이 된다. 또한 자신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선택에 대한 결정의 확신이 부족한데, 이는 자존감, 자기 사랑(Self-love)에도 치명적인 악영향을 준다.
사람들은 그저 얼굴만 보고 살이 쪘는지 안 쪘는지를 얘기했다. 날카롭고 차가운 판단의 잣대로 나를 평가하고 있었다. 시험대 위에 올려놓은 생쥐처럼. 늘 그런 느낌이었다.
턱살을 지킬까 vs 씹뱉을 할까.
안 그래도 턱살이 주 요인이었는데 거식을 하면서 씹뱉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뼈 밖에 없이 말라 있는데도 불구하고 침샘은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몸은 앙상한데 얼굴만은 풍성한 개구리 같은 느낌이었다.
그 당시 갈림길의 길에 서 있었다. 침샘을 더 이상 크게 만들지 않기 위해 씹고 뱉는 행위를 그만둘 것인가, 아니면 계속 유지할 것인가. 사실은 이 둘의 고민 둘 다 지금 생각하면 건강하지 못한 생각이었다.
씹뱉을 하고 싶었던 것은 마른 몸을 유지하고 싶어 절식하고 그 뒤에 반드시 따라오는 부작용 같은 것이었다. 그것마저 하지 않거나 입 안에라도 맛을 느끼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이 다가오는 배고픔과 허기짐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씹뱉을 그만두고 침샘의 부기를 가라앉게 만들고 싶었던 것도 사실은 그 본질은 같았다. 턱살을 없애버리고 싶은, 날씬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에서 기인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거식증에서 벗어나야겠다 라는 큰 다짐보다 거대해진 침샘으로 턱에 더 많은 부기를 가져올 것들이 두렵고 공포스럽기까지 했던 것이다.
턱살이 있는 나를 받아들여야 했다.
턱살이 있는 나도 사랑해야 했다.
턱살이 내게 건넨 한 마디
-'열심히 살지 않은 낙오자.'
왜 턱살에 이토록 집착을 하고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을까.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자연스레 턱살이 얼마나 쪘는지, 침샘 부기는 어느 정도 가라앉았는지를 살펴보며 스스로를 괴롭히던 여느 날과 다를 게 없는 날이었다. 한참 이리 살피고 저리 살피며 어제저녁에 먹고 잤던 음식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며 턱살들을 만져보고 고개를 위로 들었다 내려놨다 하고 있었다. 그러다 거울 속에 나의 눈과 마주쳤다. 눈빛이 초라해 보였다. 이렇게 매일 같이, 매 순간을 턱살을 확인하고 있는 모습이 비참해 보였다.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토록 턱살을 싫어하는 이유가 뭐냐고. 턱살이 있으면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말이다. 턱살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 같았다.
'턱살이 있으면 게을러 보여.'
'열심히 일하지 않고 자기 관리 안 하면서 집에만 빈둥 거리는 실패한 낙오자 같이 보여.'
'돼지 같아서 미련해 보여. 삶을 열정적으로 살지 못하는 것 같이 보여.'
머리를 한대 망치로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데?'
'그런 널 누가 좋아하겠어. 누가 사랑해주겠냐고.'
턱살이 계속 존재한다면, 그 누구에게도 사랑과 예쁨을 받지 못할 것 같았다.
결국. 그것이 이유였다.
턱살의 집착은 끝이 없고 똑같은 아픔을 반복 카더라.
자. 이제 나는 모~든 음식에 대한 알레르기가 생길 만큼 삶에서 어마어마한 재앙(?)을 경험했기 때문에 턱살에 관한 이슈는 자연스레 회복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달라진 게 있을 수가 없었다. 집착적이고 강박적인 행동은 여전히, 그대로, 그곳에, 고스란히. 침투되어 남아있었다.
이 시련을 허락한 하늘도 나에 대하여 기가 차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턱살보다 더 소중한 것을 깨닫게 해 주려고 몸을 아프게 만들어서 삶을 중단시켜놓았는데 못 먹는 와중에도 여전히 거울을 보며 턱살을 걱정하고 사람들을 살펴보고 끊임없이 턱살을 감추고, 검색창에 침샘 수술, 침샘 보톡스 이런 것만 검색하다니! 혀를 두를 것 같았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자신에게 화가 났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What you resist will persist.
네가 저항하는 것은 지속될 것이다.
-Mary Jelkovesky (Dealing with Holiday Meals, Mary's cup of Tea Podcast)
저항하고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것들은 그에 대한 집착과 저항이 해결이 될 때까지 다른 형태로 쫓아다닌다. 몸이 아프게 된 이후로 턱살에 대한 마음이 확 사라졌다고 해도 신체 이미지(Body Image)와 신체 왜곡현상, 거식증은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턱살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하더라도 또 다른 부분에서 집착의 모습으로 나타나 반드시 그것은 다가올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내면에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무의식은 계속 오랜 시간부터 쭉 자신의 아픔을 바라봐 달라고, 돌봐달라고 안에서 외침으로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시를 하고 저항을 하여도 내면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나타난다. 언제까지?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자유와 평화를 누릴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