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주세요!

by 고유

어린이 안전교육 매뉴얼에는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와주세요"라고 외치라고 나온다. 어린이의 구조요청을 무시할 어른은 많지 않을 것이므로 “도와주세요"를 잘할수록 어린이는 안전해질 것이다. 그렇게 무탈하고 안전하게 어른이 된 X-어린이들은 더 이상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유난히 상대방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인색하다. 그 이유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과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주요한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사람들은 타인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다. 코넬대학교에서 실시한 실험에서 낯선 사람의 부탁을 수락한 사람의 비율은 도움을 요청한 사람의 예상보다 평균 48% 높았다(하이디 그랜트 할버슨, ⎡어떻게 마음을 움직일 것인가⎦, 2020). 사람들은 타인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준다는 연구결과는 그것의 진위여부를 의심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히 많다.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은 제안서를 써야 했을 때가 있었다. 제안서를 쓸 때 우선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제안요청의 배경이다. 고객사의 현재 상황과 니즈가 도출된 배경, 본 과업으로 기대하는 바를 파악해야 고객에 맞춘 제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 보통 고객사와 고객사의 주요 사업과 관련한 최근 뉴스를 섭렵하고 유관 프로젝트들을 훑어보며 전체적인 니즈 도출의 맥락을 예측한 후, 고객사와 미팅이나 통화를 통해 상황을 좁혀나간다. 주어진 시간이 많다면 - 물론 그런 적은 없었다 - 이 모든 과정들을 착실히 수행했겠으나, 내게 주어진 시간은 삼일 남짓이었다.


이 상황에서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선택지는 '일단 시작한다'이다. 최근 뉴스를 빠르게 훑은 후, 유관 프로젝트의 산출물을 닥치는 대로 다운로드한다. 그렇게 파악한 파편들로 하나씩 하나씩 모자이크 하듯 제안서의 페이지를 채워나간다. 이걸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본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경험 상 많은 사람들이 이 선택지를 택한다. 해볼 수 있는 데까지 스스로 해 보는 것은 지식이나 기술의 내재화에 중요하며, 특히 주니어에게 장려되는 태도이다. 하지만 생산성이 최우선 가치가 되는 비즈니스 환경에서 이미 어딘가에 지식이 있는 것을 알지만 혼자서 해보려는 태도를 고집하는 것은 종종 시대착오적이다. 게다가 모자이크 하듯 채워진 페이지가 고객의 니즈에 꼭 맞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선택할 수 있는 두 번째 선택지는 이 모든 과정을 압축해 줄 구세주를 찾는 것이다. 고객사에 대해 잘 알거나 유관 프로젝트를 수행한 적 있는, 혹은 적어도 그런 사람을 알고 있을 사람. 이 당시 나는 앞 두 가지 경우의 구세주를 알고 있었다.

"OO님, 저 좀 도와주세요. 이 과업을 위해 이런 자료가 필요한데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OO님, 저 한 번 도와주실 수 있나요? 제가 쓴 장표 한번 봐주세요"

내가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3명이었는데, 나의 SOS에 응답한 사람은 몇 명일 것 같은가? 정답은 3명 모두였다. 도움을 요청하고 한두 시간 이내에 필요한 자료를 끌어모아주셨고, 제안에 필요한 여러 조언을 아낌없이 보내주셨다. 덕분에 빠른 시간 안에 제안 맥락을 파악하고 무사히 제안서를 쓸 수 있었다.


"도와주세요"라고 말한 덕분에 시간을 아꼈고, 자의적 해석의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도와주세요"의 부수적 효과로 내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도움을 주고자 하는 사람과 여러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도 있다. 사실 나는 후자의 덕을 많이 봤다. 사공이 많으면 산으로 간다고 하지만, 배의 방향만 잘 잡는다면 사공은 많을수록 목표지에 훨씬 빠르게 도착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선의에 조금씩 빚지며 살아간다. 우리 주변엔 기꺼이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한다. 회사생활 중에 "그 사람은 도움을 너무 많이 요청해"라는 불평은 들어본 적 없으나, "그 사람은 도와주고 싶어도 말을 안 해"라는 말은 종종 들었다. 도움을 요청한다고 해서 무능하게 보지 않는다. 제너럴리스트는 다방면으로 넓게 알아야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무엇이든 조금씩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부족한 게 무엇인지, 어느 정도로 부족한지를 파악하고 부족한 부분을 얼마나, 어떻게 채울지 빠르게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 줄 알아야 하며 이것이 오히려 유능함의 증거가 될 것이다.




<명심하기>

1) "도와주세요"는 가능한 대면으로, 그것이 어렵다면 전화를 통해 요청하는 것이 좋다. 카톡이나 메일은 진심을 전달하는 도구로서 너무 약하며, 너무 쉽게 무시할 수 있다.

2) 도움을 요청했다고 해서 반드시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며 도움을 요청했다면 도움을 통해 얻어진 결과를 공유하며 감사인사를 전한다.

3) 무엇보다 도움요청을 남발하지 않아야 하며, 도움을 요청할 때는 구체적으로 요청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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