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면 투두리스트(to-do list)형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일 것이고, 이런 말을 하는 나는 당연히 대문자 J인, 투두리스트형 인간이다. 인생 최초의 투두리스트라고 하면 방학계획표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집엔 연년생의 어린이 둘이 있었기에 두 개의 방학계획표가 있었는데 양치하기, 샤워하기, 옷 갈아입기, 20분간 피아노 치기 같은 것까지 쓰인 빽빽한 계획표 하나와 잠자기, 놀기, 밥 먹기, 축구하기, 게임하기 정도로 하루를 보내겠다는, 그야말로 직장인의 휴일 같은 계획표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겨우 일고여덟 살에도 인생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엔 동생이 우위였던 것 같다. 그러나 언제나 칭찬을 받는 건 빽빽한 쪽이었으므로, 나는 맥시멀 한 하루를 성실히 채워가며 자랐다.
방학계획표가 원투두리스트(want to do list)라면 직장인의 투두리스트는 해브투두리스트(have to do list)이므로, 어른이 된 나는 가끔 울 것 같은 마음으로 투두리스트를 들여다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하루는 짧고 해야 할 일은 언제나 넘쳐나기 때문에 증식하는 투두리스트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 중에 '진짜 해야 할 일'을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삶의 질은 대개 선택의 질과 비례하고 직장생활의 질은 우선순위 선택에 달려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우선순위와 관련해 가장 유명한 방법론은 아이젠하워의 매트릭스로 시급성과 중요도를 축으로 하는 매트릭스를 활용하여 우선순위를 정리하는 것인데, 요점은 중요하고 시급한 일을 최우선으로 하고 그 외의 일은 위임하거나 최소화하거나 계획하여 실천하라는 것이다. 많은 의사결정 방법론들이 아이젠하워의 매트릭스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그 개념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와 별개로 실행은 매우 어렵다. 해야 할 일은 많고 그만큼 시급하고 중요한 일 또한 많(아보이)기 때문이다.
제너럴리스트들은 늘 우선순위와 씨름한다. 많은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때문에 시시각각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일들이 끼어들기 때문이다. 이걸 '치고 들어온다'라고 표현하는데 상무님이, 팀장님이, 고객의 요청이 계속해서 치고 들어오는, 경마 현장 같은 우선순위 대결이 펼쳐진다. 넋 놓고 있다간 계속해서 끼어드는 말들로 인해 먼지가 자욱한 경마장 같은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므로, 경마가 아닌 이어달리기 같은 하루를 위해 트랙을 정리하고 달릴 순서를 정해 두어야 한다. 이것은 우선순위 선정에 주도권을 갖는 것인데 이때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 선택' 보다는 '우선순위 포기'라고 할 수 있다. 시시각각 시급한 일들이 치고 들어오는 업무 환경에서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을 고민하는 것보다 '당장은 중요하지도 시급하지도 않은 일'을 결정하는 것이 시간관리의 주도권을 갖는 데 용이하다. 가장 중요한 일을 선택하는 것보다 덜 중요한 일을 포기하는 것으로, 어떤 말을 오늘의 계주 경기에서 쉬게 할지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게스트의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이용해 셰프들이 15분이라는 제한 시간 내에 요리를 만들어 대결하는 프로그램으로, 제한된 시간과 제한된 식재료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뚝딱 완성해 내놓는 셰프들의 실력에 감탄하고 그 맛을 상상하며 즐겨봤다. 셰프들이 하나의 요리를 완성하는 과정은 우선순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셰프들은 게스트의 냉장고를 살펴보는 동안 목표할 요리를 정하고 요리 순서를 계획한다(재료라는 투두리스트를 작성하고 우선순위를 고민한다). 대결이 시작되면 15분이라는 제한 시간 동안 요리를 완성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어떤 재료는 포기하고 어떤 조리 과정은 과감히 생략하는 것이다. 소스를 위해 채수나 고급 향신료를 넣어 끓이기보다는 고춧가루와 마늘로만 빠르게 매운맛을 내고, 치킨을 위해 닭을 양념에 재워두는 과정을 생략하고 양념을 닭에 직접 발라 구워내는 것이다(덜 중요한 일을 포기한다). 뿐만 아니라, '유니셰프'라는 제도를 통해 장조림을 손으로 잘게 찢는다거나, 멸치 똥을 따준다거나 하는 단순 노동의 과정에 다른 셰프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아이젠하워 매트릭스에서 '긴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위임한다).
우선순위 선정에 있어 포기할 일을 결정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포기하고 싶지 않은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중요하지만 시급하지 않은 일'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인데, 경험 상 이 시간은 아이젠하워의 사분면 중 장기적으로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그러나 중요하지만 시급하지 않은 일은 시급하지 않다는 이유로 후순위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영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포기하고 싶지 않은 시간을 확보하여 루틴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월요일 점심 이후 2시간은 반드시 직무 지식이나 트렌드 학습의 시간으로 사용한다거나, 마지막 주 금요일 오후는 반드시 기존 프로젝트에 대한 회고를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다. 나는 금요일 점심 직후 1시간은 발송되는 뉴스레터 일주일치를 정독하는 시간으로 사용했다. 이때 얻는 정보는 그다음 주 미팅에서의 스몰토크에 요긴하게 활용되었고, 이 시간 덕에 산업이나 직무의 트렌드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으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상하는 데에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우선순위를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은 시간의 주도권을 갖는 것이다. 몸도 마음도 분주했던 하루의 퇴근길, 공허하고 허탈했던 마음을 기억한다.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든 순간은 내 시간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때였다. 그런 순간엔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마음으로 투두리스트를 찾았다. 어차피 분주할 거라면 내 선택으로 분주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제한된 시간 내에 여러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서는 느리거나 다친, 어리숙한 토끼만을 잡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날렵하고 똑똑한 토끼 한 마리를 잡는 것이 인생에서 더욱 중요함을 우리는 안다. 시간도, 돈도, 체력도, 열정도, 모든 자원은 제한적이고 어떤 토끼와 함께 할지는 어떤 '포기'를 선택하는지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