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문자 J형 인간이다. 입사 후, MBTI 지표들이 모조리 바뀌는 와중에도 J지표에 대한 선호는 변하지 않았다. 흔히 J형의 특징은 계획형으로 알려져 있는데 남들이 아는 나와 달리 내가 아는 나는 엉성하고 게으른 면이 있으므로 '저는 계획하는 걸 딱히 좋아하진 않습니다만...'하고 사족을 붙이는 마음으로 J형임을 인정하곤 했다. 그러다 어디선가 'J형은 계획형이 아닌 통제형이다'라는 글을 읽고 옳다구나 무릎을 탁 쳤다. (거 보쇼. 계획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니까요?) 나는 계획을 좋아한다기보단 내가 보내는 시간과 공간을 통제하고 싶고, 통제하기 위해선 예측해야 하고, 예측하기 위해서 계획을 하는 사람인 거다. 이런 통제적 성향은 필연적으로 어떤 강박을 유발하는데 내가 가진 강박은 이런 것들이다. 학창 시절 독서실에 갈 때는 주말일지라도 교복을 입었다. 왜냐? 공부는 교복을 입어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잠옷을 입지 않으면 침대에 누울 수 없고, 머리를 올려 묶지 않으면 집에서 쉴 수 없다. 침대는 잠옷을 입어야 하는 공간이고, 집에선 머리를 묶어야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되지 않겠지만 강박이란 그런 것이다. 그냥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 내가 가진 강박만으로도 나라는 인간을 충분히 설명할 것이다.
강박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생각이나 감정에 사로잡혀 심리적으로 심하게 압박을 느낌'이다. 강박은 의지와 무관하게 침범하는 생각이나 감정이고 심리적으로 심한 압박을 느끼기 때문에 즉시 어떤 행동을 하지 않으면 괴롭다. 따라서 고치거나 해결해야 할 부정적인 상태로 여겨진다. 그러나 일상을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줄 정도의 강박이라면 의사와의 상담을 통한 개선이 필요하겠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람은 누구나 몇 가지 강박을 가지고도 큰 문제없이 일상을 살아간다. 그냥 독서실에 갈 때는 교복을 입혀주고, 침대에 가고 싶어 하면 샤워를 시켜주는 것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강박을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방법은 '강박의 루틴화'인데 'A 하면 B 해야 한다'라는 강박에서 A와 B 행위 간의 관계성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정의하고, 이를 스스로 되뇌는 방식으로 뇌에 입력을 시킨 후 이것을 루틴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방식이다.
1) 관계 역전시키기
- 나의 강박 : 나는 점심을 먹은 직후, 반드시 양치를 해야 한다. 양치를 해야 오후 업무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다. 양치를 하지 못하면 일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다. 머릿속에 '양치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 강박 재정의 : 양치를 해야 업무에 집중할 수 있다 (A를 해야 B를 한다)
- 뇌에 신호 보내기 : 업무에 집중하려면 양치를 하면 된다 (B 하려면 A 한다 )
- 강박의 루틴화 : 집중이 되지 않을 때 냅다 양치를 한다
2) 강박을 스위치로 활용하기
- 나의 강박 : 퇴근 전에는 반드시 그날 사용한 텀블러를 세척해야 한다. 만약 텀블러를 세척하지 않고 급히 퇴근하게 되면 퇴근 후 '텀블러 세척해야 하는데'라거나 '내일 아침에 가자마자 텀블러 세척해야지'하고 텀블러세척무새가 되어 내내 피곤하다.
- 강박 재정의 : 텀블러를 세척해야 일과를 마무리할 수 있다 (A를 해야 B를 한다)
- 뇌에 신호 보내기 : 텀블러 세척은 일과 삶을 분리하는 스위치이다 (A는 B를 위한 스위치다)
- 강박의 루틴화 : 텀블러를 씻으면서 업무에 대한 걱정, 불안, 내일 할 일 등으로 가득한 뇌의 스위치를 끈다
'강박의 루틴화'가 가장 빛을 발했던 때는 재택근무 시기였다. 재택근무 시의 가장 큰 불편 중 하나는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인데 나는 위의 강박을 활용해 오전근무, 오후근무, 퇴근을 명확히 구분하며 일할 수 있었다.
'신경 가소성'이라는 것이 있다. 뇌가 경험이나 학습, 환경 변화에 따라 구조적이나 기능적으로 변할 수 있는 능력으로, 신경 가소성으로 인해 뇌가 학습한 것에 대해 적응하고, 재활을 통해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파블로프의 개' 실험으로 잘 알려져 있는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 실험 또한 신경 가소성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물론 나는 뇌과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강박의 루틴화'가 신경 가소성의 예시가 될지, 플라시보 효과의 일종일지 증명할 길은 없다. 중요한 건 피할 수 없으면 기꺼이 즐겨주겠다는 마음가짐이지 않을까. 그러니 그저 강박을 없애야 할 골칫덩어리가 아니라 울고 떼쓰기 전에 해달라는 걸 해 주는 게 편한 막냇동생처럼 취급하면 어떨까. 적당한 때에 간식을 먹이고 칭얼거리기 전에 목마를 태워준다면 알아서 곯아떨어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