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켜보고 있다

by 고유

연초 CEO 신년사, 부장님의 잔소리, 회식자리 건배사로 빠지면 서운한 단어가 있다. 바로 '주인의식'이다. 하지만 '3요세대(제가요? 이걸요? 왜요?)'라고도 불리는 MZ세대가 회사의 주요 인력으로 자리 잡은 현시대에 '주인의식'이라는 단어는 구닥다리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다. 주인이 아닌데 주인의식을 어떻게 가지냐는 끝내주는 힙합 라임 같은 말은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 교복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자란 세대가 직장에 대해 가지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런 현상은 비록 씁쓸하지만 현세대가 겪고 있고, 겪게 될 상황을 생각하면 쉽게 비판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주인의식이 철 지난 시대정신일뿐일까?


몇 년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효리가 남편 이상순과의 에피소드를 소개한 적 있다. 함께 나무 의자를 만드는 중에 보이지도 않는 의자 밑바닥을 열심히 사포질 하는 이상순을 보고 이효리는 "여기 안 보이잖아. 누가 알겠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상순이 대답했다. "내가 알잖아." 남들은 몰라도 내가 알기 때문에 하는 최선. 이런 "내가 알잖아"의 태도가 바로 주인의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만드는 결과물의 주인은 나인 것. 그러니 내가 나를 위해 일하는 마음.


tempImage85LnTP.heic JTBC <캠핑클럽>

주인의식은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마음과 맞닿아 있다. 대학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재학 중인 학교가 아닌 타 학교의, 학사 전공과 무관한 전공으로 진학을 결심했는데 전공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내린 결정은 아니었기에 연구계획을 작성하는 서류 전형부터 난관이었다. 이대로라면 면접장 근처도 못 가보겠다는 생각에 해당 전공에 대한 공부를 부랴부랴 시작했다. 1학년 전공책을 구해 정독한 후, 목차별 주요 용어와 내용을 정리하여 얇은 책을 만들고, 논문들을 정독하면서 연구 이슈들을 엉성하게나마 정리해 서류 전형에 함께 제출했다. (일반적인 석사과정 입학 준비와는 조금 다르지만, 당시 아무런 정보가 없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런 것들이었다.) 최종 면접전형을 끝내고 나와 가장 먼저 했던 생각은 '여기서 떨어져도 여한이 없다'였는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본 후 맛본 후련함의 감각은 몇 년이 지나도 생생하다. 다행히 석사 과정에 합격했는데, 합격 여부와 상관없이 내 열심의 끝에 다다라본 경험은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태도 지표가 되었다. 결과와 무관하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부어 본 사람은 분명 그 이전과 다르게 살아갈 수 있다.


직장에서의 일이 학창 시절의 공부와 크게 다른 점은 노력이 결과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훌륭한 전략과 피나는 노력으로도 나쁜 성적을 받을 수 있고, 반대로 그저 그런 전략과 그저 그런 노력으로도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취의 기준을 외부의 평가나 보상에 두는 사람은 다음의 성취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다. 직장 생활 중 가장 성취감을 느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대부분 머리를 싸매고 - 비유적 표현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 고민한 최선의 제안서를 완성했을 때였다. 그런 제안서가 프로젝트의 수주로 이어질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결과와 무관한 성취감이 있었다. 최선의 최선의 최선을 업데이트해 나가면서 배우는 것들이 많았고, 그 배움에서 파생된 새로운 기회들이 있었다. 나의 최선은 내가 안다.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 태도는 자기 자신과 타협의 역치를 계속해서 높이는 태도이다. 그래서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임계점을 계속해서 높일 수 있다.


또한, 누군가의 최선은 알아차려지기 마련이다. 우선, 좋은 상사는 구성원의 최선을 알아본다. 상사와 함께하는 회의에서 가장 힘이 되는 말은 "가장 고민을 많이 한 네 판단한 대로 하자"였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의 기저엔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있기에 인정받고 싶은 대상의 신뢰는 다시 내 열심의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스페셜리스트들이 어떤 지식이나 기술의 보유자로서 함께 일할 파트너로 선택된다면 - 물론 아닐 때도 있다 -, 제너럴리스트는 태도적인 영역에서 함께 일하고 싶은지 여부가 결정된다. 게다가 지식과 기술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정보의 접근 기회는 거의 동등하게 열려있고, 따라서 지식과 기술 보유에의 우위는 가변적이다. 하지만 태도는 어떠한가? 태도는 오랜 시간 누적된 습관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쉽게 변하지 않으며 필요할 때마다 쉽게 가져다 쓸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축 같은 노력이 필요하고, 그것이 목돈 같은 경쟁력이 된다.


셰익스피어 사후 5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햄릿과 리어왕은 고전으로 읽히고, <올드보이>나 <살인의 추억>은 계속해서 회자되는 명작이다. 우린 이걸 '클래식 classic'이라고 한다. 그러니 주인의식을 철 지난 시대정신으로 읽지 말고 클래식으로 내재화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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