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셋을 한 달 앞둔 11월의 마지막 날, 이제 정말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나이를 앞두고 퇴사를 했다. 이직이 아닌 퇴사였다. 뚜렷하게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항간에 아버지가 울산의 큰 손이라거나 - GDP 1위 자부심이 있는 도시 출신이라면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소문이기도 하고 - 퇴사시기를 보아하니 본인이 비트코인 큰 손이라는 가담항설이 나돌았으나 유감스럽게도 - 물론 특히 내게 가장 유감스럽다 -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컨설턴트로 약 5년간 일했다. 국내 유수의 기업에 솔루션을 제공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일했고 성과를 인정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열심히 일하는 멋진 나'를 의심 없이 사랑했다. 일이 너무너무 즐거웠다. 4년 차까지는. 컨설팅 회사의 PM으로 일한다면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하게 된다. 우리끼리 우스갯소리로 '돈 되는 건 다 한다'라고 하는데 시야가 좁은 주니어들에겐 다양한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또 기본적으로 세상만사에 주전자 같은 호기심을 가진 나라는 개인에게도 장점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주니어 딱지를 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연차가 되니 가랑비 같은 불안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도 불쑥 '내가 가진 전문성이 뭐지?', '내가 가진 강점들이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나?' 하는 고민이 끼어들었다. 이쯤 되면 어렴풋한 형태일지라도 그럴듯한 전문가가 되어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건 그냥...직장인 아닌가? '어려서부터 성실했던 콩쥐는 12년의 공교육 과정을 착실히 이수한 후 혈혈단신으로 상경하여 대학교 4년에 어학연수 1년도 모자라 2년의 대학원 과정까지 마치고, 수고스럽고 영광스러운 시간을 보낸 후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습니다'라니. 이토록 허무한 결말이 어디 있나.
업의 특성상, 다양한 분야의 프리랜서와 협업하게 되는데 그들과 만나고 나면 불안은 가중되었다. 평생직장의 시대는 저물었고 -진짜 그러한지 체감되지는 않지만, 권위 있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니 아무튼 - 시장에선 이런 사람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난 무엇을 내세울 수 있지? 일단 저는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것 같고요, 보고서 작성도 꽤 자신 있고, 아이디어를 조합하고 정리하는 데 유능한 편인데요... 그런데, 이런 게 무기가 되나? 지금은 그렇다 치더라도 10년, 15년이 흐른 후에는? 지금 이렇게 10년, 15년 일했을 때 그려지는 미래가 내가 원하는 모습인가?
가랑비 같은 불안은 조금씩 마음에 균열을 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열심히 도망쳤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로부터. 저녁 있는 삶을 추구해 보고자 가능한 야근을 하지 않았고, 그러기 위해 근무시간 동안 한눈팔지 않고 점심도 걸러가며 일했다. 회사 동료와의 만남은 줄이고, 취미를 늘렸다. 이직을 하자니 시장환경이 좋지 않았고 마음을 들여다보자니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후회가 내 일상을 잡아먹을까 겁이 났다. 그 결과, 일이 재미없어졌다.
일이 재미없어져도 할 일은 많았기에 책임감을 앞세워, 엄마 손에 끌려와 억지로 공부방에 들어가는 뾰로통한 어린이처럼 출근했다. 일이 재미없어지니 자신감도 떨어졌다. 밑천이 드러날 것 같아 두려웠고 동료나 클라이언트로부터 전화가 오면 심장이 벌렁거렸다. 가짜 활기를 장착한 채 통화를 끝내고 나면 해일 같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즈음 몸에도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식도에 애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이물감이 생겼고 뭘 먹어도 속이 울렁거렸다. 그게 일종의 공황증상임을 알게 된 건 이미 내가 가진 책임감이나 활력 - 그것이 가짜일지라도 - 같은 것들의 바닥났을 때였다.
그제야 들여다본 마음은 폐허 같았다. 폐허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흙이라거나, 나무, 벽돌 같은 것들이 필요할 텐데 내게 남은 재료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을 영영 회복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만이 마음에 먼지처럼 떠돌았다. 이런 상태로 더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퇴사 의사를 밝혔고 그즈음 최종면접에 합격한 회사의 입사 제안도 거절했다. 엉망이 된 몸과 마음을 회복하면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무기 없음의 대안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퇴사를 앞두고 회사 내에서 인연을 맺었던 분들과 밀린 방학 숙제하듯 매일 만났다. 퇴사를 하게 된 이유와 현재의 마음 같은 것들을 털어놨을 때 많이들 아쉬워해주었고 그보다 더 크게 응원해 주었는데, 퇴사자에 대한 의례적인 인사치레가 아님은 나의 안녕을 위해 조금씩 울어주던 얼굴들, 나보다 더 나의 미래를 확신하던 목소리들이 눈 녹은 자리에 돋아나는 새싹처럼 조금씩 나를 회복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응원들이 지난 5년의 시간에 대한 보상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러한 보상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면 그간의 경험이 내가 지난 직장생활에서 얻은 무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하고 싶은 마음을 잃은 것과는 별개로 '어딜 가서도 일 못한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마음이 새싹처럼 올라왔는데 이런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다양한 경험들이 어쩌면 제너럴리스트만이 가질 수 있는 무기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글을 써 보기로 했다. 다소 급진적인 전개이기는 하지만, 그간의 경험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은 내게 절실하므로. 또한 내 또래의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해볼 법한 고민일 거라고 생각하며,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어딘가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얼마간 힘을 낼 수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