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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듬 Jun 28. 2020

 숏컷과 익숙함

백수를 준비하는 마음가짐

긴 머리가 어울리지 않는 나는 중고등학생 때도 아무리 길어봤자 어깨 길이 이상을 넘기지 않았다.


똑같은 교복과 칙칙한 교실에 갇혀 발산하지 못하는 에너지를 전부 머리칼에 쏟아내는 것 마냥 정신없이 기르고 풀어헤친 채 다니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늘 짧은 머리를 고수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칼머리를 하고 집에 들어간 뒤 엄마에게 살해의 위협(... 너무 과격한 표현 아닌가 싶겠지만 내가 느낀 그때의 감정은 그랬다)을 느끼고 몽실이처럼 죄다 잘려버린 뒤로는 더더욱 짧게 치고 다녔다.


좀 길러볼까 하다가도 어깨를 넘어가는 순간부터 안 어울리는 데다가 목에 닿는 느낌이 거추장스러웠다.

사실 남의 머리도 치렁치렁한 상태인 걸 보면 마음이 불편해서 길에서든 지하철에서든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을 볼 때면 제발 묶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버스든 지하철에서든 모르는 이의 긴 머리칼이 내 팔에 닿는 것 많이 불쾌하다. 뒤에 누가 있는지 생각 안 하고 머리 막 뒤로 넘기고 그러는 사람들 진짜 밉다)



근 몇 년을 묶이지 않을 정도의 길이를 유지했다. 6주에 한 번은 꼭 다듬으러 가야 하는 머리 길이로.

칼머리 좌우언밸런스 똑단발을 돌아가며 하다가 2년 전 이맘때쯤부터 숏컷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7년째 믿고 찾는 원장님은 '자기는 두상이 예뻐서 잘 어울릴 거다. 그리고 내가 어련히 알아서 잘해주겠어. 근데 결혼식을 하게 되면 머리 자른 걸 후회할지도 모르니 결혼하면 잘라줄게'라는 모든 면에서 납득이 전혀 되지 않지만 70세가 넘으신 할머니 원장님에게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논리로 잘라주지 않으셨다.


다른 곳을 갈 수도 없었다. 펌도 안 하는 단발을 이렇게나 잘해주시는 선생님은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긴 머리는 실력이 없는 사람에게 손질을 받아도 고데기를 하든 드라이를 하든 어떻게든 감출 수 있는 여지가 많은데 단발은 실력을 여실히 드러내기 때문에 섣불리 다른 샵을 갈 수가 없다.


대부분은 해도 티도 거의 안 나는 펌을 하라고 푸쉬하여 본인들의 모자란 컷 실력을 감추려고 하는데 원장님은 커트에만 한 시간을 꼬박 투자하며 다듬어주신다. ('여자 단발' 검색하면 나오는 홍보 블로그들 보면 대부분 펌으로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낸다. 단가가 높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실력을 조금이라도 감추는 의도도 분명 있을 거다)



뭐 어쨌든, 2주 전 까일 것을 알면서 또 건네봤다.


'원장님 저 숏컷하고 싶어요.'

'그래! 더우니까 숏컷하자'


... 에? 진짜?

너무 놀란 나는 되려 한 발 물러서서


'... 어 근데 안 어울리면 어쩌죠...?'

'아니야 자기 어울려 무조건 어울려'


몇 년을 보아하니 얘는 결혼하기 글렀다고 생각하신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한 번에 오케이를 하셔서 놀라버렸다. (뭐 그렇다고 '오 그럼 이제 결혼하라고 잔소리 안 하실 거예요?'라고 하지는 않았다. 스타일을 책임져주시는 분 심사를 뒤틀리게 해서 내가 얻을게 뭐가 있겠나)    


썰컹썰컹 잘려나가는 머리칼을 보며 '이제 돌이킬 수도 없네' 생각했다. 2년 넘게 하고 싶던 스타일을 하게 되었는데 가위가 움직임과 동시에 후회하는 건 무슨 심리람.


한 시간쯤 지나고 거울을 보자마자 웃었다. 언뜻 보면 어울리는데 어색했다. 내가 만나 본 적 없는 수준의 완벽주의자인 원장님은 정말 만족해하셨고 나도 어찌 보면 괜찮았지만 역시나, 어색했다.


그런데 뭐 어쩌겠나. 이미 자른 것을.

어색한 상태로 밥도 먹고 재개봉한 콜바넴도 보고 놀다가 밤늦게 대전에 돌아와 한참을 거울을 보며 눈에 익힌 뒤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거울을 보고 또 놀랐다.

이게 누구야?

내 반팔 티셔츠들 중 20%를 차지하는 자라보이즈 11-12세용 티셔츠 하나를 입어보니 이건 뭐 영락없는 소년이었다.


그 뒤로 마주치는 회사 사람들에게서 '오 어울린다! 숏컷 잘 어울리네!'라는 빈 말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을 들어도 내 눈에는 계속 어색했다.

특히 새벽 수영을 하고 샤워실에서 수모를 벗을 때마다 속으로 움찔 놀랐다.

이게 누구야?


그런 어색함도 열흘쯤 지나자 익숙해졌다. 심지어 숏컷 이미지를 찾아보며 다음엔 투블럭에 도전해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열흘이다. 열흘.

그렇게나 어색하고 이상하고 당장 자랐으면 싶던 머리가 열흘이 지나자 이제 예전 스타일이 기억도 안 날 만큼 익숙해졌다.


아마도,


내가 그렇게나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경제활동을 안 하는 나.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나'와 익숙해지는 것도 길어야 열흘 남짓의 시간만 지나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거다.



그러니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

괜찮다. 괜찮아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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