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온 후 처음으로 새로운 미용실에 갔다.
때마침 올해 첫 한파경보가 뜨고 전날 폭설에 얼어붙은 도로로 하루 종일 제설 불만 뉴스가 터지던 그날 저녁이었다. 예약한 시간보다 퇴근시간이 생각보다 늦어서 평소 안 타던 급행까지 서둘러 타고 만원 마을버스에서 내려 얼어붙은 길을 롱패딩 모자를 뒤집어쓰고 부지런히 걷는 중이었다. 골목길이 미끄럽고 어두워 조심조심 걷는데, 마스크 틈새로 올라온 성에가 눈썹에 달라붙어 시야가 흐려져 계속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하였다. 그리하여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쯤에는 벌써 몸이 굳어있고 피곤한 기분이었다.
들어오는 나를 힐끗 본 남자 사장님은 눈짓하며 의자를 가리켰다. 분명 혼자였는데 뭔가 하던 일이 있으신가?? 의아한 표정의 내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서있으니 그때서야 자리에서 일어나며 귀에서 에어팟을 한 짝씩 떼어냈다.
“저... 전화로 예약했던 사람인데요”
“네 , 알아요 앉으세요”
주섬주섬 짐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옷가지도 벗어서 의자에 걸쳐놓고 쭈볏쭈볏 자리에 앉으려 했더니
“잠시만요, 그 물 좀 닦고 들어오실래요? “
걷는 동안 길가에 얼어붙은 눈이 운동화에 붙어 들어와 녹아 어느새 가게 바닥에 회색 운동화 물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사장님은 안에서 긴 대걸레 자루를 꺼내오더니 귀찮다는 듯 바닥 물기를 닦아냈다. 안쪽에서부터 입구 문 쪽으로 정석 방향으로. 덕분에 가게 중간쯤 서있던 나는 그 걸레질에 퇴로를 차단당하고 문가 앞까지 몰려 엉거주춤 서있게 되었다. 어차피 머리 자르는 내내 운동화에선 물기가 내내 떨어졌는데 생각해보니 손님은 일단 자리에 앉혀놓고 닦으면 안 되는 것이었나? 환대받지 못한다는 기분은 벌써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이 미용실은 커트할 때 샴푸를 세트로 안 해주고, 샴푸 하면 5천원을 따로 받는 미용실이다. 아침에 감은 머리가 생기 없이 착 가라앉은 데다 오면서 뒤집어쓴 외투 모자 때문에 마구 헝클어져있었다. 대충 봐도 커트하기에 썩 좋은 컨디션은 아니었다.
“머리 관리를 거의 안 하시는군요?”
“....”
(눈을 찡그리고 머리에 분무기로 물을 뿌리며 )
“그리고 린스를 안 하시네요? 제가 어떻게 알았게요? “
그런 질문을 굳이 한다고?
“뭐.. 전문가니까 아셨겠죠...”
“(말을 냅다 자르며) 아니, 보세요~ 정전기 나잖아요!!! 겨울철에 린스를 안 하시면 머리 스타일링이 말이죠.. (중략)
오분 넘게 일장연설-
“그러니까 린스나 트리트먼트 중 하나 정도는 꼭 하셔야 되는 거예요. 아시겠죠?”
“...”
“대답 안 하시는 거 보니 안 하실 건가 보네요?”
“네? 아.. 뭐 그런 건 아니고요”
아무 말도 없이 오분 가량 시간이 흘렀다. 스타일링이 잘 안 되는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수시로 분무기 물을 뿌리는 소리가 쉬익쉬익 이어졌다. 두어 번 자르고 분무기 한번, 또 두어 번 자르고 분무기를 뿌려댄 횟수가 벌써 대여섯 번이 넘었다. 내가 봐도 귀찮아 보였다. 이럴 거면 그냥 아예 처음부터 충분히 적시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간이의자에 앉아있지만 물에 안 닿게 최대한 뒤로 뻗어 두 턱이 된 얼굴과 일그러진 표정, 찡그린 한 눈, 그리고 머리카락이 아니라 내 얼굴과 옷까지 떨어지는 무차별 물 분사가 마치 퇴치 살포를 당하는 바이러스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린스는 왜 안 하시는 거예요? “
뭐야 , 아직도 린스 타령이야? 딱히 이유도 있는 것도 아닌데.. 생각해봐도 마땅히 그분 맘에 들게 할 대답이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귀찮아서요”
“하! 심플하네요. “
사실인데 어쩌나. 세상 이상하게 쳐다보는 눈빛은 덤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일장 연설
“손님, 염색 파마 안 하면 머리 관리 잘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서 말인데요. 그렇게 생각하실까 봐 그러는 거예요. 샴푸만 해도 머리는 상하는 거구요. 린스가 그나마 세정 후 벗겨진 단백질을 잘 보완 관리해주는 거라구요. “
“...”
“좀 .. 주로 반응이 좀 없으신가봐요 ?”
아.. 피곤하다 진짜.
“저기요.. 저도 린스를 해야 한다는 걸 많이 들어서 잘 아는데요. 근데 자꾸 왜 안 하냐고 물어보시니 딱히 할 말이 없으니까 가만있는 거예요. “
.
.
분위기가 싸해졌다. 여기 다시 오긴 글렀군. 그래 어차피 이렇게 피곤하게 구는데 다시 올 생각도 없다.
커트가 마무리되었다. 사장님은 큼지막한 핸드거울을 꺼내서 뒷머리를 비춰서 보여줬다.
“어떠세요?”
“금방 지저분해지진 않겠죠?”
“한 달에 일 센티 정도씩 자라겠죠 , 대개 그러니까요”
그래 그렇겠지 뭐.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뭐 , 손님은 좋다 안 좋다 반응이 없으시네요?”
아.. 이제 대답할 힘도 없다. 요새는 택시도 말 안 붙이는 게 미덕인데 어디 침묵 미용실도 좀 만들어주면 안 될까?
정착지 없이 미용실 미아가 된 지 오래된 내가 가는 미용실마다 린스나 드라이에 대한 조언을 들은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그들이 나에게 비난과 무시를 했던 건 아니다. 그래도 되도록 최대한 덜 티 나게끔 보이는 손질 방법을 알려주고, 최소한 해야 할 것들을 당부하는 정도였다.
이곳 미용실에서 처음 대화중엔 이런 것도 있었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뒷머리가 좀 지저분하게 보일까 봐요. 다듬으려고요 “
“그렇게까지 지저분해 보이진 않은데 뒤가 길어서 불편하세요?”
“아뇨 전 불편한 건 없어요.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이 불편하겠죠”
“본인이 머리 관리하시가 불편한 게 아니구요?”
“전 상관없는데요”
“어떻게 관심이 그렇게 없으세요? “
이곳 사장님이 본인 업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고 고객에게 헤어케어에 관한 지식과 방법을 전파하는 사명감이 투철한 것은 알겠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 분야에 같은 에너지를 지니는 건 아니고, 그렇게 관리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각자 사람마다 관심이 다르고 최소한의 필수 불가결한 것만 유지하는 분야도 있는 법이니까. 나에겐 미용실이 그렇다.
그래서 어떤 분야에 문외한인 고객이 가끔 오면 무시하고 가르치려 드는 풍토가 난 싫다. 그것은 백화점의 화장품 코너에서, 명품샵의 점원의 눈길에서, 건강식품 판매코너에서, 은행의 창구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다. 모두가 다양한 분야에 일정 수준 이상의 관심과 소양을 가지고 있으면 좋지만, 에너지가 부족해서 못하거나 혹은 에너지를 다른데 선택, 집중하고 있을 수도 있다.
처음 보는 분에게 상냥하기 위해 최대한 말을 아꼈지만, 이 정도 껄끄러운 시선과 불필요한 대답을 종용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불편해서 이젠 가지 않을 거다.
그리고 나 역시도 어디선가 그러지 않도록 잘 돌아봐야겠지. 자신에게 익숙한 분야일수록 남이 갖추지 못하고 있을 때 의아한 표정과 당황스런 말투로 상처를 남길 테니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내게 그런 자신 있는 분야가 뭐가 있나..? 생각 좀 해봐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