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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의 이너콘서트 Nov 04. 2020

외향성의 사회에서 살다

나만 몰랐던 반세기의 비밀


[1]

요즘 자기 계발 분야의 책들은 부자 되는 법이나 경제적 자유 따위의 자극적인 주제로 더 인기를 끌고 있지만 한 때는 인간관계에서의 처세술이 주류를 이루던 때도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책꽂이에 꽂혀있던 80년대 베스트셀러 '배짱으로 삽시다'나 불후의 고전이라 불리는 데일 카네기의 '인간 관계론'같은 책 말이다. 물론 나는 이런 처세술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런 책 속에서는 성공의 방법이나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 말 잘하는 법, 설득하는 법 등을 알려주며 자신감 넘치고 외향적인 사람으로 변화하라고 가르쳤다. 어느새 이 사회는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가 성공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신념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외향적인 인간상을 추앙하는 사회에서, 내성적인 사람들은 성공한 외향적인 사람들을 동경하며 그들을 닮기 위해 자기 계발서들에 담긴 스킬들을 익히느라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사람과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자신은  왜 이렇게 사회성이 부족하고 나약한 것인지 괴로워하며 자학하기도 한다.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와의 평화를 이루기까지 참 오랜 시간을 보내며, 사회화되고 성숙해진다. 


성숙이라...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오랜 시간 외향적인 모습의 사람으로 살아왔다. 단순히 모습만 그런 게 아니라 외향적인 성격이라고 믿었고, MBTI와 같은 성격검사를 받아도 늘 같은 결과였다. 


외향적인, 혈액형 B형의 나쁜 남자!


늘 사람들에게 먼저 연락해서 약속을 잡았고, 어색한 침묵이 싫어 먼저 말을 걸었다. 모인 자리에서는 늘 유쾌해야 했다. 조금은... 힘들기도 했지만 단지 피곤해서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만나고 집에 돌아와서 내가 느꼈던 감당할 수 없는 공허함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왜 그토록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렸는지, 왜 주말에 집에만 틀어박히게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2012년 이란에서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을 무렵, 나는 너무 지쳐있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멍하니 TV만 보거나 술로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잠도 깊이 들지 못해 새벽에 자꾸 깼는데,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새벽에 일어나 출장자들 편에 보급품처럼 받아 쌓아 두었던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 아이스크림을 뜨는 큰 숟가락에 이란 토종꿀을 크게 떠서 접시에 받쳐두고 거실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꿀의 달달한 에너지와 새벽 공기 속에 펼쳐진 책 안에서 조금씩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 전에도 책은 좋아했지만 그렇게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회복하는 내성적인 사람인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의 내향성으로 커밍 아웃했다.


[2]

얼마 전 회사에서 팀 단위로 DISC라고 불리는 행동유형 검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이 검사는 X축은 내향성-외향성, Y축은 일중심-사람중심으로 놓고 4가지 유형으로 성격을 구분했다.


이 검사는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우선 하나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과 사회 활동을 통해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성격을 구분해서 보여주는 점이었다. 내 검사 결과는 내향적이며(이제야?)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안정형"인데, 사회에서 만들어진 후천적 성격의 경우는 훨씬 더 극단적인 내향성으로 이동해 있었다.  회사 사람들과 개인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 지극히 불편하고, 일에 대한 의욕이 많이 떨어져 있는 요즘의 내 모습을 회사 사람들 앞에서 들켜버린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또 다른 특이한 점은, 함께 검사를 받은 팀 전원의 성격유형을 사분면 위에서 올려놓고 비교하는 점이었다. 조직 책임자의 입장에서는 각 성격유형에 따라 어떤 업무를 맡고 있는지, 서로의 관계는 사분면 위에서 서로 보완적인지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Tool이었다.


14명의 우리 팀은 4가지 성격유형이 골고루 분포하고 있는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우리 팀을 비롯한 다른 많은 팀의 임원 및 조직책임자들은 절대다수가 매우 외향적이고 업무 지향적이었다. 조직이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타협하지 않고 밀고 나갈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을 원하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인데 DISC의 결과를 보니 우리 조직도 정확히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검사를 받고 나니, 나는 내면으로 더 깊이 숨으려고 하는 조직 부적응자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팀장이 되고 임원이 되기 위해 막판 몸부림을 쳐도 부족할 판에 나는 자신감을 잃고 점점 더 무기력하기만 하다.  


1 사분면 위의 조직책임자들과 정 반대의 극단에 점 찍혀 있는 나는, 프로젝터 스크린 위에 작은 먼지처럼 힘겹게 매달려서 흔들리고 있었다.


[3]

수전 케인은 책 '콰이어트 Quiet'에서 내성적인 사람들의 특징과 강점, 그 강점을 살리기 위한 전략, 그리고 외향적 인간을 숭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안했다.


케인은 칼 융의 '심리유형'을 인용하며 내향적인 사람은 생각, 느낌과 같은 내면세계에 끌리고, 외향적인 사람은 사람과 활동이라는 외부 세계에 끌린다고 설명했다. 내향적인 사람은 사건의 의미에 집중하고 혼자 있을 때 에너지가 충전되는 반면, 외향적인 사람은 사건 자체에 집중하고 사람과 어울리는 순간에 에너지가 충전된다고 했다.


그러나 내향, 외향은 단순한 범주가 아니기 때문에 딱 맞아떨어지는 정의는 없다. 내향적이라고 반드시 수줍음을 많이 타는 것도 아니며 외향적이라고 해서 말이 많고 사람들과 늘 어울리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 수줍음의 성향과 내향성은 유사한 면이 많지만 정신 상태는 크게 다른데, 수줍음이 많은 사람은 나서서 말하기가 두려운 반면, 내향적인 사람에게는 단지 자극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뿐이라고 케인은 말했다.


우리는 매우 복잡한 개체이며 외향성과 내향성이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나의 성격을 하나로 정의하기는 어렵기는 하지만 거의 모든 심리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타고난 내향적 기질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성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자극에 대한 민감함'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데 이 때문에 내성적인 사람은 섬세하며 배려심이 많고 절제력이 강하다.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능력도 뛰어나다.


현대의 기업은 여전히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을 선호한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은 모든 커리큘럼과 강의에서 자신감 넘치고 외향적인 모습을 갖추도록 학생들을 자극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 성공한 내향적인 기업인과 사회적 리더들은 수도 없이 많다.


내향적인 리더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정보를 모으는데 집중한다. 위기상황에서 쉽게 흥분하지 않고 문제의 본질을 보려고 애쓴다. 새로운 제안도 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사람 간의  갈등을 잘 조율하며 권한과 책임을 위임할 줄 안다. 


내향적인 사람은 사회 부적응자도, 열등한 사람도 아니다. 다른 기질을 가진 사람일 뿐이다. 

우리는 내향성의 기질이 갖고 있는 장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자신의 본성에 충실하자. 느리게 천천히 가는 방식이 좋다면, 
다른 사람들 때문에 경주를 해야 한다고 느끼지 말자.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헤아릴 수 없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콰이어트 / 수전 케인)



[4]

타인의 시선이 나의 정체성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그래서 나의 정체성은 언제나 소외되고 좌절한다. 그런 좌절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고난 기질과 성격을 숨기고 타인이 기대하는 페르소나를 덧입고 살아간다.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이 시대를 살면서 낯선 사람과 일하고 소통하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그저 내가 그런 자극에 예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된다. 나도 새벽 토종꿀의 달달한 위로를 받으며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성적인 기질이 가진 장점을 바탕으로 필요한 외향적인 사회의 스킬들을 '조금씩' 익혀나가면 된다. 나만의 방식과 속도로.


내성적인 사람으로 커밍아웃한 지 이제 몇 해 되지 않은 탓에, 나는 아직도 내성적인 사람이란 딱지가 낯설고 수줍다. 다른 내성적인 사람들에 비해 유연하게 사회생활을 할 만큼 훈련도 부족하다. 어쩌면 그래서 요즘은 더 숨으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의 나를 만난 것이 반갑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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