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디의 이너콘서트 Nov 06. 2020

팀장님, 오늘은 기분이 우울해서 휴가 쓸래요.

무기력은 기분 탓인가?

"팀장님, 오늘은 기분이 우울해서 휴가를 좀 쓰겠습니다."

"에고, 이런. 그럼 쉬어야지. 푹 쉬고, 얼른 낫도록 해."


이런 아름다운 대화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야? 어제 술 먹었어?", "주식 떨어졌냐?" 

"아니요. 그냥 좀 우울해요. 오늘 하루만 쉬겠습니다."

"... "


걱정보다는, 이야기의 반쪽을 듣지 못해 궁금해하며 '빨리 이유를 대라고!!' 아우성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감기에 걸렸다거나 배탈이 났다고 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 말이다. 어쩌면 이 인간이 회사 일에 마음이 떠났구나라는 식의 뒷담화가 돌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사람들은 우울감이나 무기력감에 대해서는 어떤 일에 대한 일시적인 기분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곳에서는 감기에 걸리면 우울하다고(우울함 때문이라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사무엘 버틀러의 소설 '에레혼'의 구절을 위와 같이 인용하면서 현실의 우리는 반대로, '우울한 경우에는 감기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우울함은 감기의 한 증상일 수는 있어도, 우울함 자체로는 대접받지 못한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감정은 정말 일시적인 기분의 문제일까? 단순히 내 정신력이 약하기 때문일까?




몇 년 전, 모 회사의 해외 법인 주재원이 퇴사를 하면서 본사 팀장을 고소하는 일이 있었다. K 팀장은 미션이 주어지면 물불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이른바 '독종' 스타일의 관리자였다. 회사와 회사 임원들 입장에서는 기특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접 피를 묻히지 않아도 알아서 악역을 맡아줄 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결과물을 가져오는 인재! 


K 팀장은 매일 그 주재원에게 전화를 걸어 한 시간이 넘게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면서 부하직원을 부리듯이 모욕감을 주었다. 


"너 이번 달 손익 예상 얼마야? 야! 전화 끊지 말고 회계팀 가서 숫자 확인해와, XX야!"


이런 식의 통화는 한 시간, 두 시간을 넘기 일쑤였다.


그 주재원은 스트레스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버티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한국에 돌아와 K 팀장을 고소했는데 회사 입장에서는 회사를 상대로 고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K는 특별한 징계를 받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도 나쁜 사람이라고 뒤에서 욕은 했지만 그것이 처벌받거나 해고를 당할 정도의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언어적, 정신적 폭력은 그냥 눈감아 주어도 되는, 한 번 참고 넘어가면 되는 정도의 가벼운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이유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나만 아니면 돼.'




칸트는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은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것이 계몽주의자들이 말하는 평등의 의미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평등의 의미는 타인과 동일해져야 한다는 강박으로 변질되었다. 그 동일감을 얻지 못한 우리는 우울하고 무기력해진다


과학과 인본주의의 발달로 인간의 존엄성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믿었으나 어떤 철학자도 어떻게 자유를 얻고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해 주지는 못했다. 고작 우리는 매트릭스에서 깨어난 현실만을 보았을 뿐이며 끝없이 자유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해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사물로 전락한 이 시대에서 무료함(인생의 무의미함)은 세기의 질병이라고 했다. 이 말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이 말한 '실존적 공허'와도 맞닿아 있다.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이런 감정을 단순히 기분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 우울함과 무기력함은 훨씬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정신적 상실감이다. 인간의 실존의 문제다. 당연히 감기보다도, 주가 하락 보다도 더 고통스럽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 개인의 실존적 문제로 이런 공허감을 언급한 것이지만 나는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공동체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롬이 세기의 질병이라고 말한 것처럼 현대인이 느끼는 우울함과 무기력함에  '사회적 병'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여기서 병이라 함은, 신경정신과에서 말하는 뇌 기능의 병리학적 차원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 치료와 상담, 지원 그리고 사회적 동의를 필요로 하는 넓은 개념으로서의 병이다.


우리의 정신적 무기력함을 '함께' 극복해야 할 병으로 받아들인다면 사회 전체가 좀 더 적극적으로 교육과 치료의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존적 공허함 뿐 아니라 인간 관계 속에서 우리의 우울감과 무기력감을 더욱 악화시키는 이른바 '정신적 학대자'들에 대한 처벌도 엄중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적 언어적 폭력도 분명한 폭력이다. 물리적인 폭력과 같은 무게로 다루어져야 한다.




우리의 정신적 우울감과 무기력감은 정신의 열등함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산업사회를 달리며 어떻게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지 고민하지 못했고 배우지 못했을 뿐이다. 


언젠가 이런 대화가 가능한 날이 오길 기대해본다.


"팀장님, 오늘은 무기력한 느낌이에요. 하루 쉴까 합니다."

"그래요. 회사 걱정은 말고 푹 쉬세요. 인생의 허무함에서도 살아가야 할 의미를 찾는 하루가 되길 바랄게요."

매거진의 이전글 외향성의 사회에서 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