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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의 이너콘서트
Oct 31. 2020
초딩과 Classmate가 되다
기다림의 자녀교육
"아빠, 나 이거 듣고 싶어."
모 대학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강좌 링크와 함께 아들 녀석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몇 달 전, 프로그래밍 언어 공부를 하겠다고 해서 파이썬 책을 몇 권 사줬었는데 생각보다 재미가 있다고, 자기는 프로그래머가 되어야겠다고 하더니 괜히 하는 소리는 아니었나 보다. 강좌를 들으면서 좀 더 깊이 있게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강의 소개 내용을 보니 '자기 주도 학습'이 가능한 '영재'들을 위한 강좌로, 이런 학생들은 어차피 자기들이 알아서 공부를 하기 때문에 동영상 강의는 올리지 않으며 대신 pdf 파일로 된 간단한 교재로 알아서 공부한 후에 매주 나오는 과제물을 스스로 수행해서 제출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특이하다 싶으면서도 굉장히 관심을 자극하는 얘기였다. 학부모들이 좋아할 얘기들로 유혹하고 있었다. 내 아들이 소위 말하는 명문 대학교에서 '영재'들을 대상으로 하는 과정을, 그것도 스스로 알아서 조사하고 공부해야 하는 미션을 하게 된다고 하니 생각만 해도 내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아들 녀석이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더 커졌다. 소심하고 자존감도 낮아 쉽게 상처 받고 포기하는 일이 많은 녀석인데, 모처럼 관심을 갖게 된 일에 또 한 번 상처를 받게 되지나 않을까 싶어서였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보통 취소/환불 규정은 홈페이지 구석에 숨겨두기 마련인데 이 강좌는 과정 소개하는 부분에 큼지막하게 환불 규정을 설명해 놓았다. 강좌가 시작된 이후에도 환불 금액은 조금씩 줄어들지만 언제든 취소가 가능하다고 했다. 학생 혼자서 해나가야 하는 과정이다 보니 강좌 진행 중에도 취소를 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이 들었다.
나는 노파심에, 이 강좌는 원래 포기하는 학생들도 많고 어려운 과정이니 초등학교 6학년인 네가 하다가 그만둔다고 해도 절대 이상한 게 아니다, 언제든지 환불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엄마 아빠한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숙제는 일주일에 한 번만 내면 되는 것이니 아빠가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이 말을 하는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렇게 안심을 시켜놓고 과정에 등록했다.
"아빠, 나 이거 할 수 있을까? 이거 듣는 애들은 파이썬 엄청 잘하는 애들이겠지?"
아들 녀석도 기대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는 모양이다.
강좌가 시작되고 홈페이지에 올라온 교재와 숙제를 확인해 보았다. 예상대로 교재는 간단하게 개념만 설명되어 있어서 과제를 하기에는 충분한 내용이 아니었다. 대신 과정 담당 선생님들한테 게시판을 통해 질문을 하면 바로바로 피드백을 받는 시스템이어서 나는 녀석이 선생님들과 토론하면서 어느 정도 혼자 과제를 해내기를 내심 기대해 보았다. 하지만 역시 부질없는 부모의 바람일 뿐이었다.
일단 과정을 만든 대학원생들은 강좌에 참여한 학생들의 나이는 별로 고려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렵고 낯선 용어들이 여기저기 무심하게 툭툭 튀어나왔다. 녀석은 이렇게 어려운 말을 쓰는 선생님들한테 하는 질문은 '최후의 옵션'이라고 하면서 나를 끌고 들어갔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도 들고, 괜히 시작했나 하는 후회도 들었다. 하지만 아들내미가 얼마 안 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흥미를 느끼고 해보겠다고 한 것인데...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고 과정을 마치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아들 녀석과 나는 과정을 함께 수강하는 classmate가 되어 버렸다!
내가 프로그램 코딩을 마지막으로 해본 건 1996년, 그러니까 자그마치 24년 전이다. 프로그래밍 언어라는 것이 비슷한 논리 구조로 되어 있고 문법만 다른 것이기 때문에 대략적으로 이해는 가능하지만 파이썬이란 언어의 문법 자체는 모르기 때문에 애초에 내가 대신 숙제를 해줄 수도 없고, 녀석이 작성해온 소스 코드를 보면서 에러를 찾아 고쳐주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아들 녀석이 의지할 곳은 나밖에 없는지라, 자연스럽게 우리의 대화는 매우 건설적인(?) 토론 방식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일단 프로그램에 에러가 발생하면, 녀석은 내게 질문을 하기 전에 본인이 만들고자 했던 함수의 기능이 뭔지를 설명하고 그걸 소스코드에 어떤 방식으로 표현했는지도 설명을 해야 했다. 난 파이썬 문법을 모르는 관계로 소스코드를 직접 고쳐줄 수는 없지만 대신 그 설명을 바탕으로 논리 상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지 의견을 주었다.
이런 식의 대화는 시간이 상당히 필요했다. 에러 하나를 찾아 고치는데도 밤늦게 까지 둘이 앉아 몇 시간이나 낑낑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아들 녀석도 나에게 즉답을 받지 못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수정에 수정을 반복해야 했다.
어떤 날은, 드디어 문제를 해결했다며 만세를 부르며 껑충껑충 뛰더니 내가 다시 살펴보면서 에러를 발견하자 이불에 머리를 처박고 울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노트북을 들고 내 방에 찾아와서는 '다 해봤는데 더 이상은 모르겠다'며, 이건 프로그램 버전이 달라서 그런 거다 어쩐 거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나한테 던져놓고 자기는 벌렁 드러누워 유튜브를 보기도 했다.
이렇게 지리하고 고단한 과정이 고작 열세 살 녀석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피곤에 찌들어 퇴근한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들 녀석이 그렇게 힘들어하고 포기의 문턱을 들락거릴 때에도 나는 즉시 원하는 답을 줄 수 없었다. 다른 과목이었으면 십 분쯤 생각할 시간을 줘보고 안 되면 바로 풀어주었겠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숙제 하나를 하는데 3일, 4일 이상의 시간이 걸렸으니 말이다.
그렇게 몇 번의 숙제를 제출하고 나니 아들 녀석도 조금은 자신감이 생긴 것 같다.
"야, 이거 생각보다 힘드네. 아빠도 이렇게 힘든데... 넌 괜찮냐? 너무 힘들지 않아?"
"아니야 아빠. 유튜브에서 다른 프로그래머 얘기 들었는데, 이게 프로그래머의 숙명 같은 거래. 그래도 끝내고 나면 성취감 쩔어!"
아들 녀석 입에서 성취감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감격스러워서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아들과 시간을 보내다 보니 녀석이 어떻게 문제에 접근하는지, 어떤 부분을 어려워하는지 또 어떤 순간에 성취감을 느끼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공부의 방법은 예전의 나와는 많이 다르지만 어쨌든 나름의 방식으로 해나갈 것이라는 믿음도 생겼다. 그건 자기 혈육에 대한 막연한 믿음과는 다른 종류의 믿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녀석과 훨씬 더 친해졌다. 매일 저녁도 함께 먹고 일과 중에 메시지도 자주 보내온다. 이제는 자기가 본 유튜브 영상도 들고 와서 재밌다고 보여주곤 한다. '그런 걸 왜 보냐'며 잔소리를 하던 부모에게 자기가 보는 유튜브 영상을 함께 보자고 하는 건 큰 변화다.
몇 만 원짜리 인터넷 강좌 덕분에 많은 것을 얻었다. 답만 달랑 던져줬거나, 뭘 가르치는지도 모르는 학원에 보냈다면 얻기 어려운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아이가 무언가를 배울 때 부모의 믿음과 기다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