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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의 이너콘서트 Dec 03. 2020

가위바위보에 맡긴 운명

[1]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을 후다닥 먹어치운 아이들은 축구를 하러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86년 아시안게임의 여파로 축구를 하는 애들이 많아진 탓에, 서두르지 않으면 축구 골대가 다 차 버린다. 운동장 한가운데 모여 팀을 짤 때면 의례 준석이와 경철이 주변으로 모였다. 거의 매일 축구를 했던 우리들은 이미 반에서 누가 제일 잘하는지 알고 있었고, 그 둘이 팀을 정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둘의 축구 스타일은 마치 독일과 아르헨티나의 축구처럼 확연히 달랐다. 


준석이는 덩치가 크고 힘이 좋았는데 숨을 씩씩 거리며 뛰는 모습이 마치 성난 코뿔소가 달리는 것 같았다. 수비하는 애들은 전차처럼 돌진하는 준석이와 부딪칠까 봐 몸은 피하면서 발만 뻗는 시늉을 하다가 맥없이 뚫리는 경우가 많았다. 경철이는 아담한 몸에 움직임이 빨라 요리조리 수비를 피하며 뚫고 들어가는, 이른바 개인기의 축구를 했다. 운동장에는 다른 반 아이들도 바글바글했는데  고무줄 하는 여자애들과 치기 장난하는 애들을 가볍게 피하면서 드리블을 했다.


아이들은 준석이와 경철이의 축구 스타일에 각기 선호가 달랐으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 둘의 결정에 따라 뽑힌 애들은 오늘은 독일 선수가 되었다 내일은 아르헨티나 선수가 되곤 했다.


한 팀 당 7~8명 정도였는데 준석이와 경철이의 가위바위보로 번갈아 가며 한 명씩 선발되었다. 내 드래프트 순위는 언제는 7번 아니면 8번이었다. 난 준석이와 특히 친했는데 네 번째, 다섯 번째 선수가 정해질 때쯤이면 준석이에게 간절한 눈빛을 발사하며 나를 뽑아주기를 애원했다. 하지만 그 녀석은 축구에서만큼은 냉정했다.


난 반에서 키가 제일 컸고 육상부에 들어가도 될 만큼 달리기도 빨랐다. (지금도 순간 속도는 나쁘지 않다. 다만 100미터 완주를 못할 뿐...) 다른 운동도 그리 못하지 않았다. 5학년 때부터 배구부 코치가 몇 번이나 러브콜을 보냈으니까. 그래 뭐, 사실 축구는 별로이긴 했다. (아마도 몸싸움을 꺼려하는 나의 배려심 넘치는 성향 때문일 것이라고, 비겁한 자체 분석을 해본다.) 그렇다고 내 드래프트 순위가 최하위라니! 아무튼 난 그렇게 축구를 제일 못하는, 소위 '아싸'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루는 준석이 팀에 아예 끼지도 못하고 경철이 팀이 되어 수비를 보게 되었다. 준석이가 단독 드리블을 하며 내 앞으로 미친 듯이 달려들어왔다. 내가 비켜서지 않으면 일부러라도 부딪칠 기세였다. 내가 몸을 살짝 틀면서 공만 걷어내려고 하는 찰나 (생각처럼 멋진 포즈는 아니었을 것 같다)


"우씨, 비켜!"


하면서 나를 밀치고 지나갔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공격적인 모습에 놀라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준석이가 나에게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녀석의 얼굴과 목소리가 오랫동안 잊히질 않았다.


다음 해 우리는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다. 운동장이 작기도 했고 고등학교 형들과 운동장을 함께 쓰고 있어서 축구를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준석이와는 반도 서로 달랐고 내가 먼저 찾지 않으면 만날 일도 거의 없었다. 조금은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겨울방학 즈음, 우연히 준석이 집에 놀러 가게 되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무슨 참고서를 보는지 내가 꺼내보려 하자 보지 말라며 짜증을 냈다.


'우씨,비켜!' 하며 나를 밀치던 준석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 그건 어쩌면 성적으로도 나를 이기고 싶어 했던 친구의 열등감과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내가 아무리 간절히 바래도 뽑힐 수 없는 점심시간 축구시합의 가위바위보 드래프트처럼 말이다.


[2]

어린 시절 그 운동장의 가위바위보 드래프트는 성인이 되어서도 때로는 저주가 되고 때로는 축복이 되며 계속 내 인생에 영향을 미쳤다.


벌써 까마득히 오래된 일이지만 지금 다니는 회사에 1차 면접을 본 날이 생생히 기억난다. 면접은 한 번에 8명씩 진행을 했는데 면접실에는 훨씬 더 많은 면접관이 앉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면접관들은 각기 다른 사업부의 팀장들이었는데, 마음에 드는 지원자를 몇 명 뽑은 뒤 해당 사업부 내에서 다시 2차 면접을 보는 방식이었다.


그 당시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면접을 보러 온 친구들보다 네댓 살이 많았다. 면접실 안에서 만난 그 친구들의 패기 넘치는 모습과 조금은 과한 박학다식함에 살짝 기가 눌렸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몇몇 면접관들은 안정적인 정부 연구소를 그만두고 영어 강사 생활을 하고 있던 내 경력이 흥미롭다고 느꼈던 것 같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특히,  주류(主流, 술 회사 아님) 사업부의 팀장들이 지원자들을 마구 뽑아가는 상황에서 어느 비주류 사업부의 두 팀장님들은 왜 형님만 두 번 연속으로 정하냐, 아니다 이번엔 내 차례다 하며 실랑이를 하다가 그중 한 팀장이 억지로 나를 뽑게 되었다.


내가 볼 때 그 두 분 팀장님들은 다른 사업부에 사람을 다 뺏기기 전에 아무라도 잡고 보자고 하는 간절함(?)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타인의 가위바위보로 회사에 들어오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어이가 없다. 나는 그 당시 내가 가고 싶은 사업부를 분명하게 밝혔음에도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내가 과장 진급 대상자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 해 우리 팀은 다른 팀들과 합병이 되면서 인원이 100명 가까이 되었고, 과장 진급 대상자만 작년에 미끄러진 사람까지 포함해서 10명이 넘는 상황이었다. 사실 나는 그 해 상반기까지의 상황만 보면 가망이 거의 없었다. 다른 선배들 먼저 챙겨줘야 하지 않겠냐며 제일 만만한 나에게 계속 박한 평가 점수를 주던 팀장은, 내년에는 꼭 챙겨주마라는 말만 남기고 해가 바뀌기 전에 회사를 그만둬 버렸다.


그 해 여름 어느 날, 새로 팀에 합류한 선배가 나를 회의실로 부르더니, '야, 네가 두바이 오퍼레이션 맡아라. 수작업이 너무 많네'라고 말했다. 그 선배의 일방적인 말투에 빈정이 상한 나는 회의실에서 진하게 한 판 붙었다. 그리고... 바로 꼬리를 내리고 두바이 업무를 받았다. 그런데 내가 떠맡은 지역의 매출이 급성장을 하기 시작하더니 전년 대비 두 배가 넘는 매출을 기록하게 되었다. 물론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난 단지 본부의 주니어 담당자였을 뿐이니까.


그렇게 그 선배의 일방적인 업무 던지기 식 드래프트 덕분에 난 그해 최고 평가를 받았고, 사업부장의 인센티브도 받았다. 그리고 과장으로 승진도 했다. 아, 인생에 순응하고 살면 이렇게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첫 주재원을 나가게 되었을 때도 비슷했다. 주재원을 나가고 싶다고 내 담당 임원께 몇 번 말씀은 드렸지만 비주류 사업부에는 기회가 없었다. 마침 옆 사업부의 어느 주재원이 임기를 마치고 귀임하는데, 워낙 오지인 탓에 서로 안 나가겠다고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었다. 그걸 본 우리 담당 임원이 그 폭탄을 들고 와서 나한테 전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다른 사람들의 가위바위보에 휩쓸려 첫 번째 주재 생활을 떠나게 되었다.


[3]

앞서 언급한 사례는 사실 나의 작위적인 선택적 편집이라고 해야겠다. 남이 대신 결정해준 운이 좋았던 사례만 얘기했으니 말이다. 오히려 그 작은 운동장에서 나를 뽑아주기 간절히 바랐으나 외면당했던 굴욕적인 가위바위보의 저주는 그 이후로도 줄기차게 계속되고 있다. 기분은 나쁘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좀 뽑아주세요.'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내가 늘 타인의 욕망에 순응하며 살았다는 것은 아니다. 난 태생부터 삐뚤어져서 그렇게 살지 못한다. 불만 투성이다. 다만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우유부단해지고 있는데, 중요한 결정일 수록 내가 선택할 옵션이 더 이상 없을 때까지 결정을 미루는 경우가 많아졌다. 내가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이 두려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가위바위보를 하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남이 뽑아 주는 건, 이제 재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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