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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의 이너콘서트 Nov 25. 2020

행복 욕구는 단지 진화의 부산물인가

클루지 / 개리 마커스

어릴 때부터 인간이 사는 목적은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주입식으로 배웠다. (주관식 문제에는 '행복추구'라고 써야 정답이다) 과목도 다양하게 국어, 사회, 도덕, 국민윤리 등등. 교육부(그 당시 이름은 문교부)에서 만든 교과서이니 비록 과목과 학년은 달라도 정답에 대한 일관성은 있었다. 


물론 그 당시는 나라의 훌륭한 산업역군을 길러내기 위한 공교육이었으니 그렇게 단순 무식하게 가르쳤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이해는 된다. (설마 요즘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는 않겠지....?)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지금의 행복한 상태를 지속한다는 의미이거나 아니면 미래에 행복한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라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아니면 조만간 행복해질 예정인가?

그런데 만약 이 두 가지에 모두 해당되지 않으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인가?


우리는 인생에서 느끼게 될 행복이 너무 벅차고 기대되어 엄마의 자궁을 박차고 자발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타의에 의해 주어진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은 "왜 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개리 마커스의 책 '클루지'에서 이야기한 행복에 대한 진화론적 담론은 많은 위로를 준다. 인간은 진화론적으로 타고나기를 행복에 집착하도록 되어있고, 그 행복이란 것도 인간의 특성상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1) 쾌락


과일의 단맛에 쾌감을 느끼는 것은 영양분이 많은 음식을 지속적으로 섭취할 수 있는 동기가 될 수 있으므로 진화론적으로 유리하다. 그러나 인간의 쾌락 체계는 몸에 안 좋은 설탕의 단맛과 구분하지 못한다. 


섹스의 경우, 진화론적으로 번식을 위해 유전자가 쾌락 체계를 형성했을 수 있으나 그 행위가 임신에 이르는 조건 (이를테면 대상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피임을 했는지, 대상이 몇 명인지 등등)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아이러니하게 피임을 통해 100% 쾌락만을 위한 섹스라 하더라도 우리의 유전자는 이 쾌감을 걸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쾌락들은 진화에 의해 형성된 본능에 의해 자연적으로 생긴 부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이것들은 대단한 가치가 있는 쾌락도 아니고, 반대로 이런 쾌락을 즐기고(?) 있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물론 중독이라면 치료는 받아야 한다.)


2) 행복 체감의 법칙: 왜 행복은 오래 머무르지 못할까?


우리 뇌는 상황이 어떻게 되든 거기에 익숙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을 순응(Adaptation)이라고 한다. 로또에 당첨이 되어도 초기의 황홀감은 곧 사라진다. 우리의 뇌는 우리가 그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3) 행복의 쳇바퀴: 수입은 늘어도 행복은 늘지 않는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상대적인 행복을 추구한다. 예를 들어 동료 직원들의 평균 수입이 900만 원인 직장보다 동료들의 평균 수입이 600만 원인 곳에서 본인만 700만 원을 받을 때 더 행복하게 느낀다. 우리는 그저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아무리 더 열심히 일해도 행복의 수준은 본질적으로 그대로인 행복의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셈이다.


4)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 있는가?


행복을 측정하는 우리의 능력은 형편없다. 단순히 뇌 스캐너나 도파민 측정기가 불충분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관적인 행복감은 다른 많은 신념들과 마찬가지로 맥락(Context)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게다가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그만큼 덜 행복해진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행복한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행복을 해부하는 것은 개구리를 해부하는 것과 비슷하다. 
둘 다 해부 중에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


저자는 말하길, 진화는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도록 진화시켰다고 했다. 그러므로 행복은 우리를 움직이는 동력 이상의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는 인간인 이상 진화가 만들어 놓은 쾌락 체계와 행복 욕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는 행복해도 된다. 단지 우리가 아등바등 행복을 좇다가 아이러니하게 불행해지거나 스트레스를 받진 말자는 얘기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내가 원하지도 않았던 충동적 본능은 아닌지, 아니면 남과 비교하며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지 말이다. 비록 개구리처럼 해부 중에 죽을지언정, 진화가 만들어 놓은 부산물인 '행복추구'의 욕구를 좀 더 의미 있게 만드는 일이 되지 않을까.




책 클루지 전체의 내용은 심리학적으로 인간이 가진 편향과 오류에 대해 이야기한 책이지만, 그중 행복에 관한 내용만 뽑아서 언급해 보았다.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지면, 

저자는 '클루지'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는 않았는데 책 전체의 맥락에서 보자면, '세련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작동을 하도록 만든 것. 그러므로 태생적으로 결함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에서 나온 단어 중에서는 "땜빵"이란 말과 가장 어울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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