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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의 이너콘서트 Nov 08. 2020

옛날 책을 다시 꺼내 읽는 이유

기억, 강박, 그리고 후회에 관하여

지난 4월에 한국에 돌아와 자가 격리 때문에 부모님 댁에 2주 간 머물렀다. 부모님은 근처 이모님 댁으로, 이모님은 사촌 누나 집으로 대피를 하는 엄청난 민폐를 끼치면서 자가 격리를 시작했다.


네 세대가 이동을 하는 난리 법석을 피며 시작한 자가격리의 하루하루는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소소한 재미 외에는 지루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작은 골방에 처박혀서 하루 종일 읽고 또 읽었다. 일주일쯤 지나니 가방에 들고 온 책과 크레마에 있는 전자책까지 다 읽어 버려서 더 읽을 게 없었다.


마침 골방에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다닐 때 샀던 책들이 조금 남아있었다. 이삼십 년을 넘게 책장에 꽂혀있던 책들은 그 모습이 너무 오랫동안 익숙해져 버려서 책 이라기보다는 가구의 한 부분처럼 느껴져서, 정돈되어 있는 그 오래된 질서를 함부로 꺼내 무너뜨리면 안 될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책장을 바라보고 앉아서 익숙한 책 제목들을 찬찬히, 하나씩 읽어 보다가 손이 가는 대로 몇 권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예전 책을 다시 읽는다는 건 단순히 책을 읽는 것 이상의 즐거움이었다. 누렇게 바래진 책의 페이지 사이사이에 여전히 살아있는 기억들.


금호동 언덕에 있던 작은 책방. 천 오백 원을 모으면 서점에 달려가 하나씩 사 모았던 삼중당 문고, 범우 사루비아 문고. 그 돈으로는 살 수도 없는 멋진 신간들을 만져보고 있으면 천천히 보다 가라며 조그만 의자도 내어주시던 주인아저씨.


그러나 그런 장면의 조각을 들여다보는 기분 좋은 추억은 잠시, 책을 읽었다는 기억의 또렷함이 무색할 만큼 난 책의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최근 10년 이내에 읽었던 책들은 조금 사정이 나은 편이었지만 그나마도 내 의도와 상관없이 기억 속에서 가공되고 잊히고 편집되어 있었다. 나름 책 좀 읽는 사람인 체 했던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때는 무슨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던 것일까? 이 책들을 정말 읽기는 한 걸까? 나의 과거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 시간들을 걸어 나와 지금에 이른 나는 누구인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지금의 삶은 다시 십 년, 이십 년 뒤 어떤 부분이 기억에서 지워지고 왜곡되어 남게 될 것인지.


내 삶이 불안해지면 뭔가를 더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고, 나를 극단으로 몰아붙이던 습관의 잔재들이 다시 고개를 들곤 한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내 책상 오른편에는 주말 사이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에 계속 꺼내 들었던 8권의 책이 쌓여있다. 지금 내 마음은 그 8권 중 어디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


내 과거의 시간도 지금처럼, 나에게 만족하지 못하며 지냈던 미성숙한 시간이었다. 부모님 댁 골방의 책들은 오랜 시간 그 자리에 가지런히 놓인 채, 책들이 안내하는 시간 속에 충분히 머물지 못했던 나에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쉼 없이 새로운 것을 담기만 하려 했던 시간을 잠시 멈추고 내 안에 담겨있는 것은 무엇인지 차분히 되짚어 보라고 말이다.


더 담아야 한다는 조급함은 단지 후회와 미련의 동의어일 뿐이었다.




아래는 지난 4월 자가격리를 하며 적었던 글의 일부로, 그날의 느낌을 살짝 공유해 본다.



서울. 자가격리 13일 차



크레마에 다운로드한 책은 다 읽고 남은 게 없어서, 부모님 댁에 있는 책을 몇 권 손에 닿는 대로 읽었다. 예전 내가 남기고 간 책들이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쯤 지난 책들. 시간이 흐르면서 내 기억은 얼마나 왜곡되고 얼마나 사라진 것일까.


1)  외딴 별에서 - 임문혁 시집


임문혁 시인은 내 고등학교 시절 문학 선생님이셨다. 고2 수업 첫날, 맨 뒷자리에 앉은 내 자리까지 오셔서 '자네가 ㅇㅇㅇ군인가?' 하고 물으셨다. 왜 물어보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선생님은 그 당시 신춘문예 당선 후 뒤늦게 펴낸 시집인 '외딴 별에서'를 나에게 선물로 주셨고(붓펜이란 걸로 사인을 넣어서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움에 한없이 숨고 싶은 일이지만 나도 나름 글을 끄적거려 답례로 선생님께 보여드리기도 했다.


30년이 지나 다시 읽어 보니, 선생님의 시는 자연, 특히 물과 나무에 자신을 투영해서 관찰하고, 동경하고, 고뇌하는 시였다. 내 기억 속에는 어린 왕자의 동화 같은 낭만적인 시로 남아 있는데, 오히려 괴로워하고 그리워하는 시들이었다니! 그 시절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 시들을 읽었던 것인지… 무슨 뜻이었냐고 왜 물어보지 않았던 것인지…


나는 칼날과 같이 뾰족한 물건을 버릴 때는 종이에 싼 후 스카치테이프로 봉해서 버리는 습관이 있다. 왠지 그 칼날이 비닐을 뚫고 나올 것 같고, 쓰레기를 치우다 누군가 손을 다치는 일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인데, 왜, 언제부터 그런 습관이 생겼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선생님의 시집에서 그 이유를 발견했다.



<면도날을 어떻게 버릴까>


쓰레기를 치우던 아내의 손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청소부의 뒤꿈치가 썩뚝 잘렸다.


면도날을 어떻게 버릴까?


거울처럼 맑게 빛나는 칼날.

거울 속 눈에서 면도날이 빛났다.

손에도 들려 있는 칼날.

안주머니가 섬뜩하게 잘려

찬 바람이 휘잉 지나갔다.

입에서 수많은 면도날이 쏟아져 나와

얼어붙은 겨울 하늘을

번쩍이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면도날을 어떻게 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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