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디의 이너콘서트 Dec 19. 2020

옛날 책을 다시 꺼내 읽는 이유(Ⅱ)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피에르 바야르

얼마 전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올해 4월부터 책장에 있는 옛날 책들을 다시 꺼내 읽고 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록새록 새로운 내용에 내 기억력이 얼마나 나쁜지 알게 되어 한 번 놀라고, 그나마 기억하고 있는 부분도 많은 부분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사실, 내 기억력이 엉망인 건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닌지라,  책을 읽을 때 내 나름의 보완전략을 갖고 있어야 한다. 


우선 고시생들이 공부하듯이 형광펜으로 각 챕터의 주제, 관련 근거, 결론에 색칠을 한다. 책이 지저분해져도 상관없다. 무조건 많이 긋는다! 책을 다 읽으면, 형광펜으로 기록한 부분과 챕터의 주요 내용을 에버노트에 다시 정리한다. 그리고 의미가 있는 책들은 내 생각을 담아서 저널도 한 페이지 쓴다.... 아, 이렇게까지 하면 머리에 콕 박히겠지?!


그러나 곧, 한 번 더 절망하게 된다. 그렇게 다시 읽고 정리하는 순간에도 책 내용은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 간다. 물론 내 생각이 많이 머물렀던 부분은 그나마 오래 기억에 남지만, 단순히 밑줄 좀 긋고 메모로 다시 정리했다고 해서 내 머리에 기억으로 오래 남는 건 아니었다. 내 뇌가 나름의 생존 전략으로 부족한 메모리 용량을 효율적으로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잊지 않고 다 주워 담으려면 결국, 정리한 글과 메모를 주기적으로 다시 읽고 복습해야 한다는 얘기인데, 이것도 상당히 부담을 주는 일인 것이, 과거에 남겨놓은 글과 메모의 양은 점점 늘어나서 앞으로 읽어야 하는 새로운 책만큼이나 계속 쌓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읽은 것을 복기하는 과정과 시간이 늘어날수록 새로운 정보의 Input을 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나처럼 무능력한 기억력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 사람에게 큰 위로를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읽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어쩔 수 없는 망각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또한 독서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피에르 바야르>


 피에르 바야르는 책을 읽으면서 망각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하면서 최고의 지성인 중 하나라 불리는 몽테뉴의 사례를 언급했다. 몽테뉴는 자신의 기억력에 대해 상당한 불편을 토로했는데 서재를 가다가 서재에 가는 이유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뭔가에 대해 말을 시작할 때는 생각의 끈을 놓치게 될까 봐 장황한 담론을 피했다고 한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하인들을 그들의 직책이나 고향으로 부르곤 했으며 상황이 심각해져서 자신의 이름마저 잊어버리면 어쩌나 염려하기도 했다.


화장실에 양치질하러 갔다가 다른 볼일만 보고 나온다거나, 회의 석상에서 뭔가 말을 시작했다가 애초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까먹어 버려 머쓱해지는 일, 영화 제목과 배우의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아 와이프와 스무고개를 하고 간신히 기억하게 되는 일. 나에게 일어나는 이런 일들을 보면, 5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기억력은 발전한 게 없는 것 같다. 


이미 수년 전에 꼼꼼히 읽고 주까지 이리저리 달아 놓은 책들을 마치 한 번도 접한 적이 없는 최신 저작인 양 다시 손에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나는 내 기억력의 그러한 배반과 극심한 결함을 어느 정도 보완하기 위해서, 얼마 전부터 의례적으로 모든 책의 말미에 그 책을 다 읽은 때와 그 책에 대한 개략적인 판단을 덧붙이곤 한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책을 읽으면서 품게 된 저자에 대한 전체적인 관념과 그 분위기만이라도 남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 이런. 단순히 책 속의 텍스트만 잊는 것이 아니라, 독서의 대상인 책 자체도 기억에서 잊히는 경우가 허다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 난 그 정도는 아니다. 적어도 표지를 보면 읽었다는 사실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사실 이 대목에서 자신이 없다. 읽었다는 기억을 잃은 책은, 아예 읽지 않은 책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읽은 기억이 전혀 없는 책 마지막 페이지에 내가 남긴 메모를 발견할  때의 그 섬뜩한 느낌. 공포영화가 따로 없을 것 같다.)


피에르 바야르는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자들에 대해 자기가 말한 것을 잊어버린 채 기억의 결함에 의해 자기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신이 쓴 텍스트들을 읽으면서 자신을 되찾고자 하는 그런 상황,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 타자가 되는 순간부터는 결국 인용과 자기 인용 사이의 구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젠장, 자기 자신에 대해 타자가 되는 순간이라니...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몽테뉴는 자신이 쓴 글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했던 말을 또 하는 것은 아닌지 늘 걱정했고, 이 보다 더 큰 두려움은 자신의 글을 인용한 다른 사람의 글을 보고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이렇게 까지 책을 계속 읽어야 되나 하는 자괴감이 들게 된다. 그러나 피에르 바야르는 우리가 읽었다고 믿고 있는 책들이 우리의 기억에 의해 왜곡되어 관념적인 기억만 존재하게 되거나, 어쩌면 아예 읽지 않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면서 우리에게 책을 반드시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로워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책을 대충 훑어보기만 했든, 소문으로 들었든, 잊어버렸든 말이다. 


책의 어떤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지 만큼이나 책을 읽는 그 순간 나는 무슨 생각을 했고, 무엇을 느꼈는지가 중요하다. 책의 내용을 모두 잊어버렸다고 해도 이미 나는 그 책을 읽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옛날 책을 다시 꺼내 읽는 이유도 달라져야 한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때와는 다른 지금의 내가 과거로 다시 돌아가 그 당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보석 같은 깨달음을 다시 만나고 돌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달리기와 신발에 미친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