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의 수
하늘 보길 좋아한다.
쨍한 햇볕 들이치는 한 낮이던, 그믐달 뜬 한적한 한 밤이던.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지만, 궁금하다. 하늘을 보면 나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띠는 이유를 말이다.
그러려면 땅을 먼저 살펴봐야 할까. 어디든 사람 사는 곳 비슷한 건 우리가 매일같이 디디며 살아가는 곳, 땅이 짊어진 수많은 것들이 비슷해서겠지. 흙, 식물, 동물 등 자연과 더불어 인간이 만들어낸 부산물들. 도시가 고향인 나 역시 도심의 다세대 주택가가 즐비한 골목길을 보며 정겨움을 느끼지만, 빼곡한 주거 건물과 상가 그리고 도무지 해소되지 않는 주차난으로 여기저기 불법주차된 차들 사이를 위태롭게 걷는 보행자들까지도 정겹다고 포장하기엔 답답함도 함께 따른다. 그럴 땐 조금 더 선명하고 탁 트인 시야가 있는 산과 바다를 자연스레 떠올린다. 어느 계절과 날씨든 간에 자연이 주는 쾌청함과 산뜻함은 이젠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얻는 즐거움을 앞설 정도의 행복감이니까. 이건 아마도 점점 들어가는 나이 때문일지도.
하지만 산과 들, 바다라고 인간의 부산물로 인공적이고 부자연스러운 풍경을 피해 갈 순 없다. 어디에든 침투한 그 억지스러운 것들. 그래, 도시는 도시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외곽으로 빠져나와도 뜻 모를 조형물과 빛바랜 지역 마스코트 등이 천편일률적으로 있는 걸 보면, 나한테 어울리지도 않는 유행하는 겨울 코트를 충동적으로 산 후 한 번 입고 6년 동안 옷장 깊은 곳에 박혀있는 겨울 코트 신세 같이 의미도 쓸모도 없어진 지 오래.
그래서 그런지 자연에 있으면서도 온전히 자연을 즐길 수 없었나 보다. 주변시에 걸리는 작은 이질감일 뿐인데도 흰옷에 빨간 김치찌개 국물 튄 자국만큼 거슬렸던 걸까.
불안이 높은 나는 예측 불가한 걸 최대한 예측 가능한 걸로 바꾸는 작업에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한다. 예측 가능한 큰 일정 안에서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작은 상황들은 즐기지만, 큰 일정이 흔들리는 사건을 맞닥뜨리는 순간 높은 단계의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것에 또 온 정신을 집중시킨다. 폭식을 한다거나, 잠을 지나치게 많이 자거나, 무한도전을 정주행 하거나 등등. R을 만나며 평소 불안은 많이 잠잠해졌지만 평소와 다른 이벤트를 준비해야 할 땐 높은 불안을 잠재우려 애쓰는 건 여전하다.
하지만 변화무쌍하고 기상청조차 예측 불가한 하늘을 바라보는 건 가장 큰 행복 중 하나다.
계절, 날씨, 시간에 따라 모든 경우의 수가 난무하고 해와 달, 구름, 별 단순한 조화로 때마다 달리하는 예측할 수 없는 그 풍경이 어찌나 무해하고 아름다운지.
혼자서도 반짝반짝 빛나고 청량할 것 같은 하와이의 아름다운 바다도 그날의 날씨에 따라 하늘과 동색이 되니, 사실 매일같이 하늘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섬이 되어야 마땅한 것 아닐까. '하와이 바다가 아름다운 색감을 띠는 건 순전히 매일같이 화창한 하늘 덕분이라고!'라며 괜히 실없는 생각도 해본다.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라는 바다도 인간의 손길 닿지 않은 곳 거의 없고 바다 아래에도 의도됐건 아니건 많은 것들이 가라앉아 있으니까. 쓰레기가 떠다니기도 하고. 하지만 하늘엔 이런 억지스러움이 없다. 색감조차도 말이다. 아무래도 중력에 감사해야겠다. 덕분에 하늘에 뭐라도 고정시키거나 지어댈 만한 재간이 없어서 하늘만이라도 온전히 볼 수 있으니.
인생은 살만하고, 오묘한 구석이 있어서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 몰랐다. 이것도 다 평탄치 않던 과거가 정말로 과거가 되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인 거겠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 다는 최면으로도 미화되지 않는 고통스러움을 여전히 움켜쥐고 있지만, '지나왔잖아.' 이 한마디로 괴로움을 묻고 한 걸음 내디딜 수 있을 만큼 힘이 생겼다. 뭐, R과 복실이와 함께 살며 조금씩 키운 안정감 덕분이지.
때때로 나의 행복이 언제든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여전히 올라오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온 날을 돌이키며, '이젠 행복해도 될 시기가 왔나 봐, 내 인생에도.' 그저 내 차례가 드디어 온 거구나. 이렇게 편히 생각하며 꿈같은 시간을 누리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