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이른 아침 고속버스를 타고 센트럴시티터미널에 도착해 아침을 챙겨 먹고 부족한 잠을 채우던 몇 주간의 생활. 어느새 몸도 이 흐름에 익숙해졌는지 한 달이 되던 주에는 드디어 어디든 무작정 걸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정처 없이 걷기'도 체력이 허락하지 않으면 엄두 낼 수 없는 요즘. 센트럴시티터미널의 차가운 대리석에 앉아 있던 내게 어디든 무작정 걸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 건 절친한 친구를 아주 오랜만에 보러 가는 듯한 설렘과 같은 기쁨이었다. 끝끝내 허락하지 않을 것 같던 나의 비극적인 체력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완연한 날씨 덕에 한껏 가볍게 입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지하철 3호선으로 향했다.
얼마나 설레던지.
교통카드를 찍고 3호선 대화행 지하철에 갖가지 담겨있는 묵직한 가방과 내 몸을 싣고 그리워하던 사적인 장소로 가는 중. 잡다한 생각에 엉겨 잡히지 않던 책도 그리 길지 않은 구간 구간을 지나가는 시간 동안 기분 좋게 읽혔다. 그래 왔듯 압구정역에서 옥수역으로 넘어가는 구간은 잠시 책을 덮고 지하철 창으로 바깥 풍경을 눈 여겨 바라본다. 그렇게 한강을 건너가는 순간은 지하철 안내방송뿐 아니라 지하철 안으로 들어오는 볕으로도 알 수 있다. 어두운 터널을 정해진 속도대로 성실하게 달리는 지하철 객실을 밝히는 형광등 빛을 더욱 환하게 해주는 햇볕이 가득 메운 지하철은 조금 더 밝아졌을 뿐인데 공기의 무게마저 바꾼 듯 한껏 가뿐해진다. 역과 역의 구간을 넘어가는 2분 남짓한 순간에 바깥 풍경 말고도 잠시 눈여겨보는 것이 있는데, 같은 객실의 승객들을 살짝 둘러본다. 혹시나 나처럼 스치는 한강 풍경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누군가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없으니 눈에 띄는 사람도 없던 게지. 다들 어떤 연유로 일요일 아침,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이렇게 모였는지. 역마다 낯선 이들이 내리고 탄다. 짧게는 몇 분 조금 길게는 몇 십분 같은 공간을 나눠 탄 낯선 이들은 한결같은 속도로 익숙하게 오고 갔을 지하철에 실려 각자의 목적지가 있을 역에 가까워졌을 때 앉았던 몸을 일으키고 문 앞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나 역시 종로3가역을 알리는 안내방송을 듣고 책갈피를 꽂아 덮은 책을 주섬주섬 가방의 빈 공간에 넣었다. 묵직한 무게를 감당하기엔 에코백 한쪽 끈 박음질이 떨어져 조금 위태로워 보였지만 오늘 끊어지진 않을 거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하철 문 앞에 섰다.
나의 사적인 장소.
얼마만 일까. 6번 출구로 올라가며 낯익은 풍경과 점점 가까워졌다.
한낮에는 얇은 티 한 장만으로도 충분했던 온도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우중충한 하늘. 날씨를 식전 음식처럼 음미한 후 익선동 이곳저곳을 걸었다. 마치 안부를 묻듯. 마지막으로 봤던 시기를 머릿속으로 되뇌며 달라진 곳, 여전한 곳을 눈여겨보며 스쳐 지나가는 낯선 이들의 몸짓과 말투, 목소리톤, 표정도 머릿속에 담아둔다.
이렇게 하루 종일 걸어도 행복할 것 같은 마음.
을 뒤로하고 몇 시간 후면 떠나야 하는 이 곳.
혼자 한참을 걷고 걸으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공공연한 장소와 공간일지라도 나의 은밀한 추억과 시간이 깃든 곳은 아주 사적인. 너무나 사적인 곳이 되어준다. 지나가버린 시간에 쌓아둔 모습과 기억이 곳곳에 묻어있지만 오로지 나와 거리의 사물들만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장소.
가끔은 내가 일방적으로 안국역 일대를 짝사랑하는 것 같다가도 어쩌면 아주 어쩌면 이 곳의 풍경과 사물들도 나를 그리워하고 있진 않았을까. 실없는 생각으로 잠시 행복해졌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