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에포케

초록 풀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초가을 즈음. 일교차가 커지고 짧아지는 해 길이에 늦여름과 초가을이 함께 하던 밤. 그날은 산책으로 즐겨 걷던 홍제천을 뒤로하고 천 위로 뻗어 있는 짤막한 다리를 건너 연희동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동주거 집사람들과 함께.


그렇게 다리를 건너면 아주 가파른 언덕 하나가 나오는데 그 언덕배기를 넘으면 연희동이 나온다. 익숙하게 다니던 길목이지만 동네의 경계를 넘는 즐거움은 매번 나를 찾아와 들뜨게 했다. 아마도 뭔가를 구분하는 경계가 참 별거 아니라는 게 느껴지면서 그 구간을 흥미롭게 여겼던 모양이다.

천 하나를 끼고 달리하는 두 동네의 분위기는 많이 달랐고 그래서 기분도 묘했다. 전에 낮에 한번 가볼 기회가 있어 연희동 주택가를 둘러봤는데 평소 동네 골목이라 하면 협소하고 무질서하게 주차된 차량이 떠올랐지만 그곳은 너무 멀끔해서 희한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겨울의 냉기가 채 가시지 않아 조금은 두툼하게 입은 옷차림과 함께 볕 좋은 초봄의 날씨 덕으로 약간의 습한 땀이 몸에 서리면서 옆 동네의 낯선 풍경과 분위기에 여러모로 들뜨기 충분했던.


그날로부터 봄이 지나고, 여름을 지나 가을로 들어서는 경계에 집 사람들과 별 것 아닌 소소한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며 밤공기와 함께 하던 순간의 감정은 곧 기억으로 남아 몇 해가 지난 지금도 문득 떠오르는 소중한 찰나다.

주황빛 가로등이 아닌 백색 가로등으로 밝혀진 연희동 주택 골목을 돌아 다니며 가로등 불빛의 거리감에 따라 집사람들 표정의 이목구비엔 그림자, 어둠,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계절의 고유한 분위기를 친구 삼아 상기된 각자의 마음은 표정과 목소리, 몸짓으로 서로에게 닿았고, 평소 동네의 경계의 구간인 가파른 언덕배기 위의 수상한 다리가 늘 궁금했는데 우린 만장일치로 그 다리를 산책의 마지막 장소로 정했다.


수상하다고 생각했던 그 다리로 이어지는 초입을 찾는 것도 많이 흥미로웠는데 오솔길처럼 만들어 놓은 초입길을 두리번거리다 찾아냈고, 그 길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연신 감탄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수상해 보이는 다리의 초입이 오솔길처럼 되어 있으리라 짐작하지 못한 부분이라 그러지 않았을까. 예상치 못함은 흥미를 주기도 하니까. 그렇게 예상치 못함을 건너 도착한 다리 위는 왠지 동네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느낌이었다. 수많은 불빛이 한눈에 들어와서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괜한 벅차오름을 오롯이 느껴볼 새도 없이 아무런 별빛이 보이지 않는 밤하늘과 마주했다.


그렇게 아무런 표정 없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들떠있던 내 모든 감각들은 딱딱하게 굳는 것 같았다.

헤아릴 수 없는 서글픔은 목젖이 먹먹할 정도로 지속됐지만 집 사람들과 함께 있어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겠지. 다리 위에서 그날의 모습을 핸드폰 카메라로 담았고 이 사진을 뒤집고 싶었다.

하늘과 땅을 경계 짓는 능선이 건물의 각진 선으로 대신하는 도시 불빛이 탈탈 털려 하늘로 쏟아지길 바랐거나, 아무런 표정 없는 밤하늘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으로 거꾸로 매달려있는 사람의 모습을, 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날 그리 긴 시간을 다리 위에서 머무르진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머무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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