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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Jan 13. 2018

순종으로 말씀을 듣다

아브라함과 베드로


2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3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었다. 그는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켰다. 번제에 쓸 장작을 다 쪼개어 가지고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그곳으로 길을 떠났다. 4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멀리 그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창 22:2-4, 새번역)


성경을 읽다가 항상 이 부분에서 답답해진다.


내가 아브라함이었다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런 시험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시험하시는 분이라면 누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까?

혹시 나에게도 이런 시험을 하시면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이 부분을 한 번도 깊게 묵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 교회에서 아브라함 일생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믿음의 조상처럼 보이지 않았던 아브라함과 계속 주일마다 마주치게 되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자신의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같이 있었던 아브라함.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신 자신의 부모를 장례 치르고 오겠다고 부탁한 제자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으셨다) 

자신의 아내를 두 번이 팔았던(?) 아브라함,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러 가는 천사에게 롯을 구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던 아브라함.

아내의 요청으로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얻게 된 아브라함.

아내의 분노로 인해서 이스마엘과 하갈을 광야로 도망가는 것을 못 본 척했던 아브라함.

이런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굳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웠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과 성격이 나의 부모님에게도 있었기에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하나님은 뜬금없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받치라는 명령을 하셨고(그것도  번제로) 내가 그렇게 깔보았던 아브라함은 떠난다. 나도 아들이 있기에 아브라함이 받았던 그 상심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된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런 명령을 하셨다면, 아마 나는 저를 번제로 태워 주십시오라고 말했을 것이다.

최소한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서 무조건 회개를 하면서 야곱이나 요나처럼 목숨 걸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을 것 같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사흘 동안 하나님이 정한 산으로 떠난다. 나는 그동안 창세기를 읽으면서 내가 알고 있는 아브라함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


왜 그는 거부하지 않았을까? 

자신에게 아들을 준다는 하나님에게 웃었던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런 순종을 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께 왜 그래야만 되는가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았을까?    

혹시, 소돔과 고모라 사건 때 자신의 간청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부탁도 하지 않는 것일까?


결국,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받치려고 할 때,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창 22:12, 새번역)


정말, 하나님은 그제야 알았을까?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서 이삭의 심장을 향할 때, 그때서야 하나님께서 알았을까?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알았기 때문이다.


31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32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33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34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눅22:31-34, 새번역)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행동을 미리 알고 계셨다면, 하나님도 분명히 아브라함의 행동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왜 배신을 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이제 알았다]라고 말씀하셨을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경고성 예언을 받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모든 4 복음서에서는 베드로의 배신 사건이 기록되어졌다.


분명, 예수님은 베드로가 닭이 세 번 울기전에 배신할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비웃지 않았다. 혀를 차면서 인간의 충성과 한계에 대해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 그것을 알려 준 것은 하나님이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랑했다. 닭이 울기전에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의 한계를 미리 위로해주셨다,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를 용서하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너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베드로의 인생에 대해서 알려 주셨다. 

예수님은 사탄에 의해서 무너지고 있는 베드로를 끝까지 붙들고 있었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떠난 그 자리에 남아서 묵상(상상) 중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했을까?

정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알고 싶어 했을까? 몰랐을까?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알려 주려고 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3번 질문하시고 다시 부르신 것처럼, 하나님도 항상 실수하고 자책하는 아브라함을 세워주고 싶어 했다.

이삭을 보는 아브라함이 기뻐했을까? 물론 기뻐했겠지만, 그동안 하나님을 의지 않았던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죄책감을 가졌을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을 기쁘게 한 적이 없었다.


만약에 나를 몇 번 실망시켰던 내 딸과 아들이 나를 사랑하고 기쁘게 하려고 했지만 자신들의 부족함으로 자책하고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나는 자녀에게 충분히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여전히 그들이 자책을 하고 나를 두려워한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 했다. 아브라함이 참으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을 아브라함 스스로 깨닫게 해줄 사건을 준비하셨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까지 실패자로 살았던 그의 과거에 대해 나처럼 험담하는 믿음의 후손들에게 아브라함을 제대로 세워주고 싶어 하셨을 것이다. 

나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아브라함 믿음에 대해서 감히 말도 꺼내지 못한다. 그의 믿음 행위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시는 예표가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아브라함 앞에서 까불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고 후배들이 나처럼 겸손해지길 원하셨다면 그 뜻을 이루신 것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예수님은 베드로 자신을 사랑하는지를 창세전에 알고 계셨다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지를 창세전에 알고 계셨다. 


아브라함과 베드로, 불신과 배신의 사람들.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세워주셨다.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 조차도 하나님은 인정하셨다.

자신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도록 사건을 만드셔서 그들을 세우셨다. 


아브라함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셔서 용기 있게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

베드로가 자신이 예수님을 진짜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것을 믿게 도와주시는 예수님 

바로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사랑, 그 사랑을 알고 계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드러내신 사건이 있었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그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29 거기에 서서 듣고 있던 무리 가운데서 더러는 천둥이 울렸다고 하고, 또 더러는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 하였다. 3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이다. (요 12:28-30, 새번역)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천둥처럼 들린다.

어떤 사람에게는 천둥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린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을 했다면 그분은 천둥소리에서 자신의 음성을 듣게 하신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우리의 순종에서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대답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알고 계셨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대답하지 않고 주변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알고 계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토록 사랑하는 그 마음을 아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

그 마음을 아셨기에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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