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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예수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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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Jul 22. 2020

본능에 충실한 신앙생활.

인간의 본능, 그것은 예배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알에서 태어난 새의 새끼는 눈을 뜨지도 못했는데 어미 새가 다가오면 입을 벌려 음식을 달라고 합니다.

지금 막 태어난 강아지는 어미 개의 젖을 찾아 먹습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의 입에 손가락으로 입술을 건드리면 입술을 모아 젖을 먹으려고 합니다.

생존 본능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을 향한 어떤 본능을 주셨을까요?

거듭난 기독교인이라면 거듭날때 경험한 성령충만이 무엇인지를 알 것입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그 본능(?)입니다.  그러니깐 제 말은 원래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그 기쁨을 본능이라고 말씀 드린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뻐하라 ... 혹시 이것은 훈련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피조물 인간에게 있는 기쁨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세계에서 살아야 하는 모든 피조물에 생존과 성장을 위해서 본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을 제외하고) 모든 피조물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원래 주셨던 본능대로 생태계를 이루면서 살아갑니다.




본능本能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미와 기준이 다릅니다. 어떤 분은 본능을 번식기에 있는 동물의 발정기 정도로 생각합니다. 또 어떤 분은 하나님의 달란트와 소명으로 생각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본능本能이라는 한자의 직역은 ‘스스로 지닌 능력’이라는 의미입니다. 말 그대로 학습하지 않는 능력을 말합니다. 영어에서는 본능은 instinct입니다. 이 단어는 한자(본능本能)보다 더 많은 영감을 줍니다. instinct은 어원은 자극하다 to incite라는 라틴어 동사의 과거분사라고 합니다. in 안으로 '내부' 를 의미하는 접두사 in 과 '찌르다( sting )' 에서 나온 stinct가 합쳐져서 '내부에서 자극을 주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를 처음 생각한 고대인들은 본능은 자신 안에서 뭔가가 계속 자신을 자극하는 그 무엇인가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저는 본능本能 / instinct을 대신할 단어를 만들어 보려고 했습니다.

그것만이 본능을 이해하는 또 다른 인식과 개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본능을 느껴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본능’ 자체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나에게 본능이 있는데, 본능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저는 내 안에서 나를 찌르는 본능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집에서 기르는 늑대처럼(본능 없이 반려견이 되어버린), 저는 이 사회에 적응되도록 잘 길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신 본능보다는 세상이 정한 규칙과 가치관에 순응하도록 주기별로 리셋 하나님이 주신 본능을 잃어버렸습니다.


인간은 사회에서 경쟁력이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12~16년 동안 본능에 거스르는 주입식 학습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끊임없이 경쟁하기 위해서 신형 컴퓨터 장비처럼 계속 프로그램을 포맷하고 업그레이드를 반복하면서 생존 전투형 피조물이 되어갑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취업을 위해서 그리고 출세를 위해서 이런 주입식 교육은 본능의 존재를 경험하지도 못합니다. 영어 점수와 학점 그리고 봉사마저도 모두 대학 입시와 취업을 위한 학습일 뿐입니다.


나는 살면서 생리적 욕구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본능을 경험한 적이 있을까?

과연 창조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본능은 무엇일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공중의 새를 보면서 우리는 본능을 알 수 있습니다.

새는 태어나면서부터 날아다니려고 합니다. 그 어떤 새도 뱀처럼 기어 다니려는 새는 없습니다. 자연계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 본능이죠. 자신이 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날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라고 했던 공중의 새는 제가 평상시에 생각하는 그런 능력(본능本能)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날아다니는 새의 본능의 실제 힘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기에 새는 본능적으로 날고, 본능적으로 먹이를 찾아서 먹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공중의 새는 하나님의 먹이심, 바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기르심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피조물의 본능,

그것은 하나님의 기르심에 순종하는 것이 아닐까요?


본능은 하나님이 원하셨던 모습대로, 그리로 하나님의 기르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선악과 사건과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피조물의 본능을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뿐만 아니라 들에 핀 백합화를 가리키면서 하나님의 통치 하심을 설명해주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런 식물은 저절로 자라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들에 핀 백합화는 하나님의 정원에서 하나님의 돌보시고 기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중의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보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할 수 있지만, 솔직히 사고로 떨어져서 죽은 새와 사람에 손에 뽑힌 백합화를 보는 순간에 하나님의 통치를 의심합니다. 어쩌면 인간은 길가에 있는 풀을 뽑아 보면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피조물 인간인 내가 이렇게 식물을 한 손으로 뽑아 버렸는데 ... 이 풀을 기르시는 하나님은 왜 이 풀을 가꾸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힌다."


‘내일 걱정을 하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하심에 순종하는 것' 본능이 완전히 파괴되고 오직 현실 감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기르시는 손길을 인식하는 본능을 인식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답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본능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님을 느끼는 것,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인도함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본능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과 영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본능本能, 그것은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느끼는 힘입니다.



마태복음 6장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해서, 자기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모두가 구하는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찾는 것이 당신의 본능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당신의 본능입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말씀을 읽습니다.

SNS를 내려놓고 말씀을 묵상합니다.

마음을 찌르는 말씀은 두렵고 어렵기만 기도하고 순종하여 행합니다.

내 안에서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느끼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만들었을 때 주셨던 순종의 본능을 느끼려고 합니다.


매일 실수하지만, 매번 도전합니다.

세상에 길들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본능에 충실히 하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종교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그 무엇인가를 믿습니다.

저는 사람의 본능本能을 종교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성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마음, 하나님이 주신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에 주어진 본능本能, 본질적인 능력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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