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성인이 되었고, 나는 법인이 되었다
아들이 법적으로 성인이 되던 날, 녀석은 주민등록증을 들고 편의점에 가서 종류별로 술을 사 왔다. 몇 달 전부터 “성인이 되는 날 모든 술을 마셔 보겠다”고 벼르던 터였다. 아직 사춘기의 물이 다 빠지지 않았기에 금지된 것에 저항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게 보내는 어설픈 시위 같기도 했다. 나는 술 알레르기가 있어 함께하지 못했다. 아들은 방문을 닫고 들어가 혼술을 하며, 아빠 눈치 보지 않고 마신다는 해방감에 취해 있는 듯했다.
그렇다고 아들의 ‘술 마시는 성인식’이 마냥 못마땅한 것은 아니다. 다만 예전부터, 아직 사춘기 호르몬의 숙취에서 깨지 못한 아들에게 어떤 성인식을 해줘야 할지 오래 고민해 왔다. 지인들은 “아들과 술 한 잔 나누면 그게 성인식”이라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어른이 되는 의식이 필요했다. 나 자신도 친구들과 여관방에서 술을 마시며 성인식을 보냈기에, 아들에게만큼은 내 경험보다 더 나은 성인식을 선물하고 싶었다.
전 세계의 성인식을 뒤지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비전 퀘스트(Vision Quest)’를 발견했다. 자연 속에 홀로 고립되어 금식과 기도, 명상을 통해 삶의 소명을 깨닫는 통과의례다. 특히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스스로 성인이 되었음을 자각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의 아들에게 이를 권했다가는 “왜 내가 그런 고생을 해야 하냐”는 반문만 돌아올 게 뻔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성인이 될 때 “나는 누구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했다면, 지금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아들의 성인식을 찾다가 결국 인디언의 은퇴식까지 찾아보게 되었다. 임원 계약 종료를 앞둔 나에게, 인생의 전환은 아들의 성인식보다 더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는 순간을 의식으로 통과하듯, 은퇴 역시 새로운 역할로 건너가는 의식이 절실했다. 아들의 성인식을 찾던 질문이 결국 내 은퇴식으로 돌아온 셈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공동체 가운데는, 은퇴한 이를 그저 ‘노인(Older)’이라 부르지 않고 ‘장로(Elder)’라 칭하기도 한다. 라코타나 나바호 같은 이야기에서 장로란 단순한 연장자가 아니다. 공동체가 길을 잃었을 때 방향을 제시하고, 삶의 경험으로 젊은 세대에게 길을 보여주는 존재다. 장로는 직함이 아니라 공동체가 맡긴 역할이다. 장로는 연장자가 아니라 방향이다. 그들에게 은퇴는 무대 뒤로의 퇴장이 아니라, 지혜와 전통을 전수하는 ‘어른’으로의 등극(登極)이다. 즉, 나이 듦은 ‘일의 끝’이 아니라 ‘책임의 질이 바뀌는 순간’인 것이다.
유네스코가 무형문화유산을 ‘세대를 거쳐 전승되는 지식과 기술’로 정의하듯, 수많은 실패와 성공을 통해 얻은 통찰은 ‘나만의 무형문화유산’이 될 수 있다. 전승될 때 비로소 유산이 된다. 진정한 어른, 즉 ‘장로’가 되기 위한 은퇴식의 세 가지 질문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지혜에서 빌려왔다.
첫째, 무엇을 내려놓는가.
둘째, 무엇을 다시 맡는가.
셋째, 누구에게 남기는가.
이 질문에 답해 가는 과정에서 은퇴는 ‘공허한 종료’가 아니라 ‘위대한 시작’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임원 퇴직 이후 내가 경험했던 것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1인 기업을 세우기로 했다. 10년 전 휴간했던 유니타스브랜드를 복간하여, ‘엔텔러키브랜드’를 1인 독립 잡지로 만드는 나만의 무형문화유산을 짓기로 한 것이다.
굳이 1인 기업 형태를 택한 이유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못 하는지 명확히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1인 기업을 통해 1인 브랜드 학교(My Name Class)를 만들자”는 것이 내가 주장해 온 휴먼브랜드 캠페인이었다. 이번에는 주장만 하지 않고 내가 직접 그 과정을 경험하고 증명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나에게도 사업자등록증이 나왔다. 아들에게 주민등록증이 나왔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사업자등록증을 보면서 왠지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고, 지금 하면 이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30년 전 내가 주민등록증을 받았을 때 느꼈던 기분에 취해 버린 듯하다.
아들은 주민등록증을 받고 성인이 되었지만, 나는 사업자등록증을 받고 법인(法人)이 되었다. 아들은 주민등록증을 받으며 성인만이 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생각하지만, 내가 받은 사업자등록증은 법인으로서, 그리고 어른으로서 내가 완수해야만 하는 책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퇴직 후 맞이한 중장년의 1인 기업가는 사업의 결과보다 과정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막상 1인 기업가로 뭔가를 해보려 할 때, 할 수 있는 게 없고 막막하다는 사실을 공포처럼 맞닥뜨린다. 그 느낌은 마치 인디언 소년이 성인식을 치르기 위해 칼 한 자루와 화살 몇 개만 들고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처음에는 그런 공포와 두려움, 자괴감과 막막함이 불편했다. 하지만 이것은 성인에서 법인이 되는 과정이었다. 내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나의 ‘비전 퀘스트’였다.
내가 1인 기업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과연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나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사명감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할 수 있을까’가 ‘내가 해야 한다’로 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