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는 누구일까?
5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나일까.
5년 후의 나는 지금의 나일까.
아니다.
어젯밤에 쓴 연애편지를 아침에 다시 읽으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처럼, 한 달 전, 6개월 전, 1년 전에 쓴 일기를 읽다 보면 내가 아닌 나를 만난다. 내가 1997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2000년부터 지금까지 본격적으로 이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다르다는 사실을 삶의 현장에서 반복해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일기를 쓰면 지금의 나와 앞으로 바뀌어 갈 미래의 나 사이에 있는 편차와 시차가 보인다. 나의 일기는 사건 기록이나 감정 변화만 적는 노트가 아니다. 그날의 기분을 넘어, 왜 그런 판단과 결정을 했는지, 그때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그 의미가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지를 함께 적는다. 어찌 보면 의약품 연구실의 임상시험 보고서처럼 쓰는 셈이다.
이렇게 쓰다 보면 그때 중요하다고 맹신했던 것의 실체가 나중에 드러난다. 내가 나를 기만하며 가치 있다고 여겼던 것의 민낯도 보인다. 특히 내가 나를 속인 사건의 현장까지 고스란히 보존되어, 뒤늦은 현장 감식도 가능해진다. 내가 일기를 쓰는 목적은 당시에는 몰랐던 나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다. 동시에 반복해서 출현하는 내 패턴을 관찰하며 미래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하기 위해서다. DNA 수사로 과거의 미제 사건을 해결하는 것처럼, 현재의 기록을 통해 과거에 나를 관통했던 운명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내게 일기는 오늘을 ‘쓰기’와 사건을 ‘기록’하는 행위에 머물지 않는다. 오늘에 반응하는 나를 ‘읽기’이며, 과거·현재·미래의 나를 ‘잇기’다.
이런 일기 쓰기는 하늘의 별자리 잇기와 닮아 있다. 아주 오래전 목동들은 밤하늘의 별을 연결해 이야기가 있는 별자리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별자리를 만든 이유는 이야기를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라, 북극성의 위치를 찾기 위해서였다. 수많은 별은 지구의 자전 때문에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에 방향을 고정해 주지 못한다. 수억 개의 별 중에서 방향을 알려주는 별은 오직 북극성뿐이다. 그래서 별자리는 북극성을 찾기 위해 만든 이야기 지도다.
내 인생에도 별처럼 많은 사건, 사람, 이슈가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내가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일기는 수많은 이야기를 연결해 만든 지도이고, 나를 찾아가는 길이다. 그 지도에서 내가 찾는 북극성은 한 가지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죽을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살든 간에 반드시 죽는다. 그것이 변하지 않는 유일한 진리다.
예전에는 내가 쓴 것 같지 않은 내 일기를 읽고 당황했다. 지금은 다르다. 인생의 자전과 운명의 공전 속에서 내가 별자리처럼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의 사건보다 상황과 선택의 이유를 기록한다. 그 기록은 낯선 나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된다. 헨젤과 그레텔이 떨어뜨린 빵조각은 새들이 먹어치워 사라졌지만, 나의 일기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이정표가 된다.
이런 일기 쓰기는 현재를 해석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미래를 예언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이 결정을 두고 미래의 내가 이런 마음이라면, 그 가치는 이런 뜻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말을 건넨다. 때로는 반대로,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말하는 문장도 기록한다. “이 결정은 2030년의 내가 2026년의 너에게 보내는 조언이다.” 일종의 묵시록 같은 일기다.
일기를 쓰며 배운 사실은 분명하다.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다. 지금의 나 또한 미래의 내가 아니다.
도심의 불빛 때문에 밤하늘의 별이 잘 보이지 않듯, 인생의 별도 내가 켜 둔 과잉된 불빛 때문에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일기는 주변의 네온사인을 하나씩 끈다. 빛이 꺼지면 별이 드러난다. 별을 오래 바라보면 유난히 움직이지 않는 별 하나가 보인다. 그 별은 지금의 내가 아니라, 내가 되어야 할 나다.
일기는 나를 읽기 위해 쓰는 자기다움의 지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