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에서 나듦

나이가 들면 내가 될 수 있을까?

by 권민

어제는 아빠보다 커 버린 아들의 새 옷을 입어 보았습니다. 헐렁한 옷의 공간 사이로 비로소 ‘나이듦’이 보였습니다.

나이 드는 것은 자연이지만, 나다워지는 것은 훈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나이듦은 어떤 모습인가요?



아들은 고1 때까지 나와 옷을 함께 입었다. 우리 둘 다 무채색에 가까운 무난한 옷을 입는 편이라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고2가 되면서 아들의 몸은 늦가을 회색곰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키와 체중이 달라지니 옷을 자주 새로 사야 했다.


나는 177cm였고 아들은 183cm가 되었다. 그때부터는 내가 아들의 큰 옷을 입는 일이 생겼다. 아들의 2XL 옷을 받아 입으면, 옷 안에 남는 공간에서 아이가 커졌다는 사실이 먼저 느껴졌다.

아들의 옷을 입고 거울을 보니 내 모습이 아빠 옷을 입은 늙은 아들처럼 보였다. 그 장면에서 처음으로 ‘나이듦’이라는 시간을 몸으로 실감했다.

해가 바뀌며 나이는 숫자로 업데이트되지만, 그것을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아프면 회복이 더디고 무리하면 오래 힘들다는 방식으로 노화를 체감하기도 하지만, 그 체감은 늘 늦게 온다. 시간은 분명 빠르게 지나가는데 그 속도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지구가 마하 86쯤 되는 속도(29.78 km/s)로 공전해도 우리는 그 움직임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인생도 한순간에 지나가지만 그 속도를 깨닫는 때는 대부분 죽을 때쯤이다.


지인의 부모님과 우리 부모님을 보며 생각이 정리되었다. 자녀들에게는 노년을 잘 정리하고 잘 죽는 부모가 되고 싶었다. 나의 죽음도 그들에게 하나의 유산이 되게 하고 싶었다. 죽음을 피하는 유산이 아니라, 죽음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유산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나이 들어야 할까. 동기들을 보면 저마다 다르게 나이 들어간다. 노화가 오는 방식도 다르고 퇴행의 강도도 다르다. 그 차이를 보며 나는 한 질문을 붙잡게 되었다. 나의 나이듦이 나듦이 될 수 있을까. 나듦은 ‘나다워지는 삶’이다. 같은 시간 속에서 나이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이 나를 더 닮아 가는 방향으로 정리되는 것이다.


이 질문의 답을 찾으며 살다 보니, 나이듦은 자연이지만 나듦은 훈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이 들어가는 것은 저절로 일어나지만, 나답게 나이 드는 것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노인의 시간은 결과이고, 나답게 늙는 것은 태도의 결과다.


열역학의 언어로 말하면 나이듦은 엔트로피의 증가처럼 보인다. 젊을 때는 에너지가 한곳에 모인다. 직장과 역할과 목표가 나를 묶어 주고 밀어 준다. 그러나 퇴직과 함께 에너지는 시간 속으로 흩어진다. 같은 하루인데도 방향이 분산되고 집중이 흐려진다. 나는 그 흩어짐을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흩어지는 에너지의 방향을 다시 정렬하는 일을 선택했다. 나는 그것을 ‘나듦’이라고 부른다.


성년이 되는 과정은 아들처럼 몸이 자라며 옷을 바꾸는 일로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그러나 나답게 나이 드는 일은 몸을 붙잡는 데 있지 않았다. 마음을 몸에 맞게 조율하는 훈련에 있었다. 예전의 속도와 욕심을 그대로 유지한 채 몸을 끌고 가려 하면, 결국 마음이 무너진다. 나듦은 그 반대의 방향에서 시작된다. 몸의 리듬을 받아들이고 그 리듬에 마음의 기준을 맞추는 일이다.


이제는 더 이상 아들의 큰 옷을 입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사실이 나를 작게 만들지는 않는다. 나이듦은 몸을 붙잡는 일이 아니다. 마음을 몸에 맞게 맞추는 훈련이다. 나이듦이 나를 닳게 할 수도 있고 나답게 만들 수도 있다. 결국 나는 ‘나이듦’이 아니라 ‘나듦’을 선택하고 싶다. 나이듦은 자연이고, 나듦은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