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연장이 아니라 생명 연명

자기다움의 시작을 죽음을 직면하는 것

by 권민

수면 내시경을 받을 때면 묘하게 흥분되면서도 긴장된다. 한순간에 ‘딸각’하고 정신을 잃는 그 감각이 마치 임사체험(臨死體驗)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나에게 수면 유도 주사약은 몸에서 빠져나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사람도 죽을 때 이런 감각을 겪는 것일까.


스티브 잡스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냥 전원 스위치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딸깍!’ 누르면 그냥 꺼져 버리는 거지요. 아마 그래서 내가 애플 기기에 스위치를 넣는 걸 그렇게 싫어했나 봅니다.” (스티브 잡스 자서전 887페이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왜 그런 사람이었는지를 더 선명하게 알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앞에 두었을 때, 자기다움은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나 역시 자기다움을 아는 데에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의외로 단순해진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 뜻대로 죽음을 선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최근 내 주변에는 병원에서 투병 중인 부모님 문제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친오빠와 아빠의 코줄과 삽관 문제를 상의하고 왔어요. 마음이 너무 힘들어요.”

“10년 동안 병으로 누워 계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나는 울까?”

“치매 걸린 엄마가 아빠를 너무 괴롭혀요.”

“치매이신 아빠와 암 투병 중인 엄마 때문에 당분간 이 일은 못할 것 같아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기술로 100세까지 이어지는 생명 연장이 과연 진짜 삶인가. 나도 이미 가족들에게 말해 두었다. 연명치료를 거부하겠다고, 죽음이 어느 정도 가까워지면 식사도 거부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하지만 내가 자유의지를 잃은 상태가 된다면, 그런 결정을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


어제는 수면 내시경을 받다가 마취에서 잠시 깼다. 눈을 떠 보니 내 팔을 잡고 있는 간호사가 있었다. 마취가 깼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에 물고 있는 기구 때문에 신음 소리만 낼 수 있었다. 다행히 간호사는 내 눈을 보고 알아차렸고 팔에 다시 주사약을 투입했다.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 낯선 사람들이 움직이는 대로 내 몸을 맡긴 채 누워 있는 것. 중환자실에서 죽어 가는 과정도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


잡스의 말처럼 죽음의 순간은 전원 스위치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죽어 가는 과정은 오히려 배터리가 서서히 방전되는 일에 더 가깝다. 스위치는 내가 선택할 수 없지만, 죽어 가는 태도와 준비만큼은 어느 정도 내가 선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기다움은 어쩌면 어떻게 죽을까를 말하는 데 있지 않고, 어떻게 죽어 갈 것인가를 결심하고 준비하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20대부터 40대까지의 자기다움이 자기답게 살기 위한 선택이라면, 50대 후반부터의 자기다움은 자기답게 죽어 갈 준비를 결심하는 일일 수 있다.


결국 자기다움은 살아 있을 때만 필요한 말이 아니다. 마지막이 가까워질수록 더 절실해지는 말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어느 나이가 지나면 그 질문은 자연스럽게 바뀐다. 나는 어떻게 죽어 갈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 비로소 삶의 군더더기가 지워지고, 내게 정말 중요한 것만 남는다. 자기다움은 삶의 스타일이 아니라, 죽어 가는 태도의 이름이다. 자기다움은 한 번 이루는 목표가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과 죽어 가는 동안 끝까지 붙들어야 할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