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잘하는가보다, 무엇을 다르게 하는가

소명이 나를 찾다

by 권민

“네가 보기에 나는 뭘 잘하는 것 같니?”

은퇴 같은 퇴직을 하고 다음 일을 찾던 친구가 내게 물었다.


인생의 이 시점에는 신발 속에 들어간 작은 돌멩이처럼, 걸을 때마다 마음을 찌르는 단어들이 있다. 중장년이 되어 다시 ‘일’을 선택해야 할 때 마주하는 소명, 천직, 자기다움, 평생 직업 같은 낯선 단어들이 그렇다.


그전까지 우리의 기준은 연봉과 대우였다. 하지만 은퇴에 가까운 퇴직을 겪고 나면 삶의 문법 자체가 송두리째 바뀐다. 이때 받는 충격은 단순한 실직이 아니다. 생존의 문제와 존재의 문제가 한꺼번에 흔들리는, 삶의 붕괴에 가깝다.


사람들은 이 위기의 순간에 인생의 탈출구처럼 ‘소명’을 찾는다. 하지만 그 생각에는 함정이 있다. ‘찾는다’는 것은 그것이 아직 내 밖에 있다는 전제이기 때문이다. 소명은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오래 있었지만, 아직 꺼내지 못한 나를 알아보는 일이다.

방향이 다르다. 내가 소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소명이 나를 알아보게 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아내를 통해 배웠다. 30년 전, 행사장 한쪽에서 대학생 아르바이트로 묵묵히 설거지를 하던 아내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일을 특출나게 잘해서가 아니었다. 그 사소한 일을 대하는 ‘태도’ 속에 이미 그 사람의 본질이 투명하게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전공은 성악이었지만 지금은 사회복지사로서 발달장애인을 돕고 있다. 처음에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시작한 자원봉사였다. 아내를 처음 본 동료들은 일을 참 잘한다며 사회복지를 전공했느냐고 묻곤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아내가 진짜 잘하는 것은 사회복지라는 기술이 아니다. 어떤 일을 하든 그 행위 안에 배어나는 섬김이다. 섬김은 직업이 가르쳐준 기술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원래 있던 고유한 본질이다.


‘사회복지사’는 직업의 이름일 뿐이다. 하지만 ‘섬김’은 직업이 바뀌어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아니, 오히려 직업이라는 껍데기가 바뀔 때 그 알맹이는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이것을 ‘두 번째 나’라고 부른다.


첫 번째 나는 직장과 사회가 만들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경쟁하고 생존하는 모드로 길들여져 왔다. 하지만 두 번째 나는 내 안에 원래 있었지만 아직 드러나지 못한 본연의 나다. 사자가 스스로 사자임을 자각하지 못하듯, 우리도 자기 안의 본질을 가장 늦게 알아보는 존재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보다 나를 오래 지켜본 사람의 정직한 시선이 필요하다.


나는 친구에게 질문을 바꿔보라고 했다. 그리고 오래 지켜본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어보라고 권했다.


“내가 무엇을 할 때, 다른 사람처럼 보이지 않니?”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나다워 보이니?”


그 대답 속에 ‘두 번째 나’가 숨어 있다. 첫 번째 나는 직업이 만들지만, 두 번째 나는 소명이 만든다.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을 잘하는가”가 아니다. “무엇을 할 때 가장 나다워지는가”, 그리고 “나만이 다르게 할 수 있는 본질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 질문을 가족부터 시작해서 지인 10명에게만 물어보자. 뜻밖의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