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청바지를 '제2의 피부'라고 부르는 브랜드, 누디진스(Nudie Jeans)가 있다. 이들은 생지 청바지를 6개월 동안 빨지 말고 입으라고 권한다. 앉고 서는 습관, 걷는 방식, 오래 구부렸던 무릎의 각도가 고스란히 주름과 워싱으로 남아야 비로소 그 사람만의 바지가 완성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6개월 동안 빨지 않은 청바지에 삶의 궤적이 새겨지듯 우리도 평생 살아온 진짜 피부 위에 저마다의 흔적을 남기며 살아간다. 나이 든다는 것은 얼굴에 깊은 골이 패이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이 하나의 선명한 결로 남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결을 '인생주름'이라고 부르고 싶다.
어떤 이는 얼굴에만 주름을 남기지 않는다. 자기 삶이 지나온 길 자체를 하나의 단단한 결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 한 길을 걸어온 사람, 오래 한 질문을 붙들고 살아온 사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마치 끈과 매듭으로 이루어진 결승문자(結繩文字)를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손가락으로 한 매듭 한 매듭 더듬어 가야 비로소 읽히는 기록. 그것은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삶의 문자다.
그렇다면 그 주름은 어디에 새겨지는가. 얼굴에만 남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인생주름이 가장 정직하게 남는 곳이 서재라고 믿는다. 몸이 청바지를 길들이듯 정신은 책을 길들이고, 동시에 책에 의해 길들여진다. 그 오랜 길들임의 흔적이 서재에 쌓인다.
얼굴에 주름이 남듯 영혼에도 오솔길이 생긴다. 그 길은 그가 읽어온 책들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나는 타인의 집에 초대받으면 자연스럽게 책장을 본다. 나에게 서재는 그 사람이 오랫동안 가꿔온 숲처럼 느껴진다. 장식처럼 꽂힌 책도 있고 유행을 따라 들어온 책도 있다. 그러나 유독 비슷한 주제를 품고 촘촘히 모여 있는 책들이 있다. 그가 오래 붙들고 살아온 질문이 그곳에 주름처럼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서재를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이렇게 묻는다. "이 중에서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책은 무엇인가요?"
정말 책을 따라 자기 삶의 길을 걸어온 사람은 대개 망설임 없이 한 권을 가리킨다. 그 대답을 듣고 있으면 나는 책 한 권을 추천받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이 어디에 가장 오래 머물렀는지를 듣게 된다.
나는 이 질문을 가끔 밤늦게 내 서재 앞에 서서 나 자신에게도 똑같이 묻는다. 30년 가까이 브랜드를 공부하며 쌓아온 책들 사이에서 내 손가락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멈춘다. 닳고 밑줄이 겹쳐진 그 책들이 내 인생주름이다. 내가 무엇에 오래 머물렀는지, 무엇을 끝내 놓지 못했는지가 거기 고스란히 남아 있다. 책장 앞에 서면 나는 내 삶을 변명할 수 없다.
나는 가끔 내가 죽은 뒤 아이들이 이 책장을 정리하면서 나를 다시 발견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몇 권의 책 앞장에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을 적어두었다. 책 중간중간에는 연필로 밑줄도 그어두었다. 책을 그냥 덮지 않고 내가 줄친 부분만이라도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곳은 내가 오래 머물렀고 끝내 멈추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