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다음날 아침에 알게 된 것들
새벽 3시 30분, 알람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침대 옆 책상을 더듬었지만 핸드폰은 없었다.
30년 전 첫 직장에 출근하던 날부터 나는 밤 11시에 잠들어 정확히 새벽 5시 30분에 눈을 뜨는 삶을 살았다. 알람은 5시 50분에 맞춰 두었지만 몸의 시계는 늘 20분 먼저 작동했다. 휴가도 주말도 예외는 없었다.
퇴사 후에는 탈출 기념으로 아침 9시까지 늦잠을 자 보려고 일부러 핸드폰을 서재에 두었다. 그런데 왜 알람 소리를 들은 것일까. 그 소리에 잠에서 깼지만, 어제부로 회사를 떠났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다시 현실에서 깨어났다. 그 소리가 꿈이 아니었다면 환청이었을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몸이 부르는 소리였을 것이다.
없어진 것은 핸드폰이 아니라 삶의 구조였다. 몸은 회사를 떠났지만 뇌와 감각은 여전히 그 시간표 안에 갇혀 있었다.
‘유령사지(phantom limb)’라는 현상이 있다. 신체 일부를 잃었는데도 그 부위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거나 통증을 경험하는 현상이다. 몸은 이미 그것을 잃었지만 뇌의 감각 회로는 한동안 그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없는데도 남아 있는 감각이다.
주된 직장에서의 퇴사는 때로 삶의 절단처럼 다가온다. 조직에서 분리되는 순간 직함은 휘발되고, 오랫동안 나를 증명해 주던 사회적 정체성도 함께 잘려 나간다. 그러나 더 깊은 충격은 따로 있다. 내 손발처럼 움직이던 조직의 구조와 나를 대신해 일하던 시스템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는 감각적 상실이다.
직함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게 해 주는 언어였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도 낯선 상황에서도 명함 한 장이면 충분했다. 30년 동안 나는 스스로를 설명하는 법을 배우는 대신 직함이 나를 대신 설명하도록 내버려 두었는지도 모른다. 그 언어가 사라지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말을 잃는다.
퇴직 1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월요일 새벽 5시 30분이면 알람 없이 눈이 떠진다. 아내가 깨워야 겨우 일어나는 다른 요일과 달리 유독 월요일만은 몸이 먼저 반응한다. 내게 월요일은 여전히 유령 요일이다.
처음에는 이 관성이 불편했다. 억지로 눈을 감고 다시 잠들려 애썼다. 이미 끝난 삶의 시간표에 여전히 몸이 묶여 있다는 사실이 왠지 패배의 증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새 삶을 시작했다고 선언해 놓고 몸은 아직도 그 선언을 믿지 않고 있었다.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나는 그 자유를 두려워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억지로 다시 잠들려 하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마시고 책상 앞에 앉아 전날 밤 미처 끝내지 못한 원고를 다시 읽는다. 창밖은 아직 어둡고 집 안은 조용하다. 누구의 지시도 없고 나를 기다리는 조직도 없다. 그런데도 역설적으로 이 새벽은 지난 30년의 어떤 아침보다 더 내 것에 가깝게 느껴진다. 월요일의 유령이 나를 깨우지만 그 새벽을 채우는 것은 이제 내가 선택한 일이다.
은퇴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적 유령사지를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명함 앞뒷면에 전직 대기업 부장, 전 협회 상임이사 같은 이력을 빼곡히 적어 두는 사람들이다. 이미 끝난 직함을 끝내 놓지 못하는 그 모습은 사라진 팔이 여전히 붙어 있다고 믿는 감각의 오류와 겹쳐 보인다.
나는 이것을 ‘사회적 환지통’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것은 단순한 허영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의 역할에 최적화된 감각이 현재의 공백을 거부하는 저항이다. 어쩌면 은퇴 후 가장 먼저 배워야 할 일은 새로운 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시절이 진정으로 끝났음을 정직하게 승인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유령사지를 극복한다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없애는 일이 아니다. 이미 사라진 것과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동시에 인정하고 그 사이에서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은퇴 이후의 삶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감각을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잘려 나간 시간의 통증마저 새로운 리듬의 재료가 될 때 비로소 삶은 다시 내 것이 된다.
월요일 새벽, 알람은 없지만 몸이 나를 깨운다. 이제는 그런 내가 신기할 정도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 소리에 저항하지 않는다. 한때 그것은 출근을 재촉하는 알람이었지만 이제는 내가 쓸 문장을 향해 몸을 먼저 일으키는 소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