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작품

졸업 기념

by 권민

대학 시절, 졸업 작품을 준비하는 의상학과나 미술 전공 학생들이 부러웠다. 그들에게 졸업은 단지 학점을 채우고 교문을 나서는 절차가 아니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빚어낸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는 출사표였다.


이 생각을 참고로 중장년 플랫폼을 만들면서, 일터에서 물러나는 이들에게도 ‘은퇴 작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은퇴가 직책을 내려놓는 퇴장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를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인생의 두 번째 졸업이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었다.


이 상상에서 출발한 교육 프로그램이 ‘마이 네임 클래스(My Name Class)’였다. 평생 다듬어 온 전문성을 하나의 강의로 정립해 유산으로 남기는 시도였다. 처음에는 플랫폼만 잘 갖추면 충분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은퇴자들이 마주한 첫 번째 난관은 뜻밖에도 기술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혼란이었다.


“내가 가진 지식의 실체는 무엇인가.”

“나는 평생 동안 무엇을 배우고 경험해 온 것인가.”


조직 안에서는 잘 작동하던 것들도 그것을 사회의 언어로 바꾸어 꺼내 놓으려 할 때, 생각만큼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몸에 밴 암묵지를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꾸는 일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웠다.


컨셉의 반응은 뜨거웠지만 실천은 막막했다. 평생을 바친 삶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콘텐츠로 꺼내려는 순간 모두가 말문이 막혔다. 경험을 정리하는 자리에서 오히려 자신의 삶이 헛된 것은 아니었는지 되묻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프로젝트는 멈춰 섰다.


경험이 풍부하다고 해서 그것을 타인의 언어로 구조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글로 옮기려 하면 막막해했고, 영상에 담으려 하면 더욱 위축되었다. 삶의 재료는 충분했지만 그것을 하나의 개념으로 압축해 언어로 엮어내는 훈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경험을 콘텐츠로 바꾸는 일은 자료를 정리하는 기술이 아니라 삶을 다시 해석하는 작업이라는 점이다. 무엇을 했는가보다 그것이 왜 의미 있는가를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오래 일한 사람은 많지만, 자기 삶의 궤적을 자기만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정년 연장이 아니라 은퇴의 재정의다. 관습적인 송별회 대신, 한 사람의 인생 전문성이 담긴 ‘은퇴 작품’을 세상에 발표하는 문화가 정착된다면 어떨까. (그런 플랫폼을 만들고 싶었다) 그것은 끝을 알리는 마침표가 아니라, 자기 삶을 해석해 후대에 건네줄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선언이 될 것이다.


은퇴가 상실이 아닌 또 하나의 졸업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식보다 작품이다. 퇴직금 명세서보다 값진 것은 내 이름 석 자로 남겨질 단 하나의 클래스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실패했지만 여전히 이 믿음은 확고하다. 은퇴자에게 남길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남길 것을 작품의 형태로 꺼내어 본 적이 없을 뿐이다.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새로운 일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해석하고 자기 이름으로 남길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이다.


어쩌면 사람은 일을 마칠 때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때 비로소 다음 생애로 건너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 혼자라도 이 프로젝트를 ‘지금도’ 시도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