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세로
오월드에서 탈출한 늑대 늑구와 어린이대공원에서 뛰쳐나온 얼룩말 세로
늑대 이름으로 ‘늑구’는 어딘가 시골스러웠다. 마치 막내를 막둥이라고 부르듯, 늑구도 시골 슈퍼집 막내 덕구 같은 이름으로 들렸다.
늑구의 모습도 내가 영화 〈트와일라잇〉에서 보았던 거대한 회색 늑대와는 달랐다. 허스키와 시골개 사이에서 태어난 순둥한 잡종처럼 보였다.
예전에 놀이동산 울타리를 뛰쳐나온 얼룩말의 이름은 얼룩이가 아니었다. 세로줄이 예쁘다고 ‘세로’였다. 어딘가 아이돌 같은 이름이었다. 세로의 서사는 늑구보다 더 짠했다. 엄마 껌딱지였던 세로가 엄마와 아빠를 잃은 뒤 스트레스를 받아 같은 울타리에 있던 캥거루와 자주 싸웠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나는 그가 동물원에 갇힌 불쌍한 금쪽이처럼 보였다.
늑구와 세로는 모두 야생에서 붙잡혀 온 동물이 아니었다. 둘 다 동물원 안에서 태어나 그 안에서 자란, 말하자면 동물원 정규직이었다. 본능에 충실하게 땅을 파고 나온 늑구에게 바깥세상은 얼마나 다르게 보였을까. 엄마와 아빠를 잃고 스트레스 속에서 뛰쳐나간 세로는 그 길 위에서 누구를 찾고 있었을까.
나는 늑구와 세로의 뉴스를 보면서 대학 졸업을 앞둔 아이와 아직 대학 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가 떠올랐다. 그들도 교육 인생 전체를 대학이라는 출구를 향해 달려왔다. 그러나 그 출구를 지나 만난 것은 세상이 아니라, 더 세련되고 더 안전하게 설계된 또 하나의 울타리였다.
영화 〈트루먼 쇼〉의 도입에 이런 장면이 있다.
앵커가 묻는다.
“광고 없이 24시간 운영 및 방송하는 프로그램이라면, 등장하는 모든 상품이 광고인 셈이죠?”
트루먼 쇼의 총감독 크리스토프가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다 광고죠. 옷, 음식, 가정용품까지도.”
앵커가 다시 묻는다.
“트루먼은 왜 지금까지 사실을 모르고 지냈을까요?”
크리스토프는 이렇게 대답한다.
“We accept the reality of the world with which we’re presented.”
“우리는 우리에게 제시된 세상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트루먼이 세트장을 세상으로 믿었던 이유는 어리석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그 세계만 제시받았기 때문이다.
나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수년 동안 머물렀던 그 조직이 하나의 동물원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오래 다니던 조직을 떠나고 나서야, 내가 세상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울타리 안의 풍경이었음을 알았다. 그것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다만 울타리 밖에서 살아갈 야성을 나는 얼마나 갖고 있었는가. 그 질문 앞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기업을 동물원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머물렀던 울타리를 세상 전체로 착각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동물원이 아니라 그것을 세상 전부로 믿게 만드는 구조다. 문제는 학교나 기업이 아니라 그곳 밖에서도 살아갈 야성을 조용히 잃어버리게 만드는 방식이다.
늑구와 세로는 동물원에서 태어났다. 트루먼은 세트장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세 존재가 살았던 세계는 닮아 있었다. 그곳에는 먹이가 있었고, 규칙이 있었고, 안전이 있었고,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 수 있었을까. 나도 이제야 내가 보아 온 세계가 전부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계속 내가 갇힌 세상의 틈을 내는 중이다. 늑구처럼 땅을 팠고, 세로처럼 담을 뛰어넘기 위해 몸을 낮췄다. 그렇게 익숙했던 울타리 밖으로 나온 지 1년 5개월이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