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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Jan 30. 2022

죄인 중에 괴수

나도 괴수.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우두머리, 가장 큰 죄인, 가장 악한 사람) 니라 [딤전 1: 15]

바울이 죄인의 괴수라고 한다면, 나는 누구일까?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

예수님이 우리를 불렀다면 우리는 분명 죄인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죄인의 괴수들이 모이는 끔찍한 소굴이겠죠.

그래서일까요? 가끔 교회에서는 끔찍한(황당한, 민망한, 창피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모두가 한 번쯤 데어 보셨죠?


우리가 끔찍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예수님의 오심과 십자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 9:13, 새 번역)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서 사람 때문에 항상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끔찍한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고 내 앞에 있는 이웃도 죄인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죄인 중에 내가 되수니라 [딤전 1: 15]라고 디모데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사역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았던 디모데에게 바울이 [아직도 괴수이다]라는 현재형 동사를 쓰면서
여전히 자신의 죄성을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자신 안에서 사망과 생명의 법이 항상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죽고 예수님이 자신 안에서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려고 하지만 자신의 죄성에 대해서 항상 느끼고 있습니다.

바울이 죄인의 괴수라고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자신의 죄성을 느끼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까요?
나의 죄가 얼마나 끔찍했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정도였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나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죄였기에 예수님께서 나 대신에 그런 고통을 당해야 했을까?

나의 죄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예수님을 손가락 상처에 붙이는 밴드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나의 끔찍한 죄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내 안에서 나만 느끼는 이 더러운 죄성에 대해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를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교회 안에서 만나는 사람도 나와 같은 죄인의 괴수 중에 하나임을 인식(인정)하는 것이 교회생활을 편하게(?)할 수 있습니다. 다 아시죠? 
제 말은 이웃을 경계하고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중보 하며 용서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 이유가 사람 때문이라면 우리는 사람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했던 죄.
우리는 그 죄를 남의 죄가 아닌 나의 죄와 죽음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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