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 좋아합니다] 궂은일부터 하겠습니다

농구와 궂은일

by 우주

농구를 전혀 몰랐던 어렸을 때 일이다. 누군가 내게 어떤 센터 선수를 설명해 주면서, "저 선수는 블루워커"라 덧붙였다. '블루워커'의 뜻을 전혀 몰랐던 어린 나는, ‘blue worker’가 아닌 ‘blue walker’라고 제멋대로 알아들었다. ‘파란 걷는 사람’이라니, 어린 마음에 괜히 멋지게 느껴졌다. 마치 블루레인저 같았다.


이후 ‘블루워커’가 내가 상상한 뜻이 아님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궂은일을 열심히 하는 선수라는 의미도 마음에 꽤나 들어서, 유래와 무관하게 어린 시절의 동경을 조금은 갖고 있었다.


"궂은일 열심히 하는 선수가 되겠습니다"


농구를 보다 보면 많은 선수들이 포부를 밝힐 때 궂은일을 열심히 하겠다고 한다. 감독들도 늘 궂은일을 강조한다.


농구는 빠르고 득점이 자주 나온다. 게다가 5명밖에 없으니 화려한 플레이를 보여주는 선수, 그중에서도 득점을 많이 올리는 선수가 더 돋보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하이라이트 필름도 득점 장면 위주고, 궂은일은 기록지에서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가 득점을 많이 올릴 수는 없고, 그런 화려한 장면들이 만들어지기 위해선 그 선수를 위한 찬스를 만들어주는 플레이를 할 선수가 필요하다.


그래서일까. 소위 '블루워커'형 선수가 다른 스포츠 종목에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농구가 유독 궂은일을 강조하는 느낌이다. 오죽하면 슬램덩크에 나온 “화려한 도미가 아닌 진흙투성이 가자미가 돼라”는 말이 널리 알려져, 이제는 '가자미'라는 표현이 종목을 막론하고 궂은일 하는 선수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었을까.


사실 궂은일의 대표 격인 스크린, 리바운드 이런 것들 모두 , 드리블과 마찬가지인 농구 플레이의 일종이다. 그런데 왜 이 플레이들만 굳이 궂은일로 분류해서 부르는 걸까.


화려하지 않고, 기록지에도 잘 드러나지도 않는 일. 농구는 그것을 언짢고 나쁘다는 사전적 의미의 ‘궂다’를 빌려 ‘궂은일’이라고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미덕으로 여겨 궂은일을 잘하는 것을 칭찬의 언어로 사용한다. 팀워크가 강조되는 스포츠에서 누군가의 희생을 기리는 표현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무엇이 그 궂은일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내 눈은 공을 가진 선수를 쫓느라 바빴고, 자연스럽게 득점하는 순간 그 자체에 더 관심이 갔다. 그런데 어떤 선수가 국가대표에서 뛰거나 팀 구성이 바뀐 뒤 유독 더 빛나는 플레이를 보여주는 것을 보면서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생각하게 되었고, 다른 선수들의 도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코트 위 공이 없는 곳에는, 공을 든 선수가 슛을 던지거나 돌파를 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주는 선수, 우리 팀 선수가 리바운드를 잡을 수 있도록 다른 팀 선수들과 몸싸움을 해주는 선수들이 있었다.


그제야 알게 됐다. 아, 저게 바로 농구에서 강조하던 궂은일이구나.


‘블루워커‘라는 표현에 대한 오해에서 시작된 어렴풋한 동경이었고, 제대로 된 뜻을 알고 난 이후에도 한동안은 잘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보인다. 기록지만으로는 알 수 없고, 하이라이트필름에도 남아있지 않지만, 묵묵하게 승리에 기여한 선수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힘든 일을 기꺼이 해낸다는 것은 어린 시절 상상 속 블루레인저만큼이나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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