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이 아니라 시작을 쓰는 날
마무리가 되었다고 생각한 일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걸 깨닫자 머리가 뿌예졌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허둥지둥, 머릿속은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서 완성하려 들 때마다 몸이 굳어졌다. 완성은 언제나 멀었고, 나는 점점 시작을 미뤘다. 그래서 문장을 하나만 남겼다.
‘오늘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을 쓰는 날’.
이 한 줄이 나를 움직였다.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했다. 최근 들어 조금 깊어졌다고 믿었던 호흡도 쉽지 않았다. 쇄골까지 깊게 들이마시고 배꼽 아래까지 남김없이 내쉬기를 몇 번, 마음의 속도가 조금씩 내려갔다. 지금 나를 흔드는 건 ‘완벽하려는 마음’이다. 그다음엔 가장 작은 행동 하나, 파일을 열고, 한 문장을 고치고, 저장을 눌렀다. 끝.
나는 요즘 세상을 실험실처럼 대한다. 성공과 실패로 나누지 않는다. 그냥 가설을 세우고, 몇 분간 시도하고, 배운 것을 적는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가벼워진다. 결과를 쥐고 버티지 않아도 되니까. 오늘 글도 그렇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만큼 매끈하지 않아도 괜찮다. 실험실의 기록은 대체로 투박하다. 대신 솔직하다.
돌아보면, 삶이 막힐 때마다 내가 잊은 것은 언제나 비슷했다. 지금.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을 내려놓고, 그저 오늘의 한 걸음을 내딛는 것. 호흡 다섯 번, 한 줄 기록, 하나의 행동. 이것만으로도 나의 하루는 방향을 바꾼다.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미세한 전환. 방향이 바뀌면 속도는 자연히 붙는다.
작게 시작하면 가벼워진다. 가벼워지면 즐거워진다. 즐거워지면, 계속하면 된다. 또다시 작게, 가볍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