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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우주 Jan 25. 2024

엄마가 검사를 받기까지 I

엄마가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았다

 "그 검사는 왜 한 거야?"

주말에 만난 지인이 묻는다. 엄마가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난 후였다.

"엄마가 해보고 싶다고 했어.."

대답을 하며 나는 마음 한 켠에 죄책감이 또 한 겹 쌓이는 느낌이었다. 지난 11월 엄마는 허리 진료를 보시러 올라오셨었다. 병원을 모시고 갔다가 주말에 모셔다 드리기 전까지 일주일간을 함께 있으면서 엄마는 요즘 너무 정신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뇌 검사를 한 번 받아보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셨다. 엄마가 뇌 검사 이야기를 꺼낸 건 처음은 아니었다. 매일 출근길 통화를 할 때면 운전 중이니 나중에 하자 하시더니, 낮에 통화가 된 어느 하루 엄마는 돌아서면 까먹는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뇌검사를 한 번 받아보고 싶다고 하셨다.

11월에 바로 검사를 받아보았다면 조금은 달랐을까.. 이미 지나버린 과거를 곱씹고 후회하는 것이 가장 어리석다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에게 '의미 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라고 되뇌면서도, 하지 않은 일들에 대한 후회는 순간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며 명치끝에서부터 심장까지 서늘한 기운이 올라올 때가 있다.  




'돌아서면 까먹는다', '찾는 게 일이다', '내가 여기 뭐 하러 왔지?'

내가 부모님 댁에 가 있을 때도 엄마는 이런 얘기들을 종종 하셨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엄마 20년 전부터 그 이야기했어', '내 친구들이 엄만 절대 치매 안 걸릴 거 같대', '엄마 우리 집안에 치매 걸리신 분은 없어'

등등의 대답을 하고 웃어넘겼다. 실제로 엄마는 20년 전부터 그런 이야기를 하셨었고, 작년과 재작년 보건소 치매 검사에서는 정상 판정을 받으셨다. 연세가 있으시니 보건소에서 치매 예방약을 처방해 주어 그 약을 매일 드시고 계실 뿐, 한 달에 한 번 정도 부모님 댁에 가는 내가 보기에 엄마는 괜찮아 보였다. 하긴, 이제와 생각해 보면 길어야 2박 3일의 기간 동안 내가 얼마나 엄마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자세히 보았을까 싶다.


그러나 11월, 엄마는 진지했다. 엄마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심하게 까먹는다는 거였다. 금방 들은 이야기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고 했다. 나는 절. 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기에 아빠가 일을 가시고 나면 혼자 계시는 단조로운 생활에 엄마가 우울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11월에 허리 진료를 마치고 며칠을 딸 집에서 푹 쉬신 엄마를 시골에 모셔다 드리면서 12월에도 허리 진료 때문에 또 올라오셔야 하니 그때는 뇌검사를 한 번 받아보자 말씀드렸다. 그때만 해도 나는, 12월에 검사를 하여 엄마가 '괜찮음'을, '아무 문제없음'을 확인시켜 드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감정 상태에 따라 노인분들의 기억력도 달라질 수 있다고 알고 있기에 나는 엄마가 본인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도록 확인시켜 줄 참이었다.  

엄마가 본인의 건강에 대한 염려 때문에 심란하실 듯도 하여 나는 엄마를 모셔다 드리며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엄마가 와 있으니까 난 너무 좋아", "엄마가 계속 와 있으면 좋겠어", "엄마 이제 한 달에 한 번씩은 올라와서 나랑 있자"

그렇게 수다를 떨며 3시간을 넘게 꼬박 달려 부모님 댁에 도착해 보니, 엄마 말에 의하면 '주방 일은 아무것도 못한다'던 아빠는, 놀랍게도 식사도 잘해 드시고 심지어 도시락도 싸가시고 설거지도 잘하시고 주방 정리도 평소 빨래 개시듯이 칼같이 정리를 해 두셔서 엄마와 나를 놀라게 했다. 엄마는 한편으론 서운해 보였고 한편으로 안심하는 듯 보였다.

"혼자 계셔도 되겠네, 엄만 막 돌아다녀도 되겠네 이제."

엄마는 혼잣말인 듯 아닌 듯 주방에서 그렇게 낮게 중얼거리셨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부모님 댁에 갔다. 즐겁게 아빠와 셋이 저녁을 먹고 다음 날 엄마와 함께 올라왔다. 짐을 싸던 엄마가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나 2주 있다가 올 거야, 아빠한테는 아직 말 안 했어 ㅋㅋㅋ "

11월에 1주일간 엄마가 올라와 계신다고 하자 난색을 표하셨다던 아빠가 예상외로 살림(?)을 잘(?) 하자 엄마는 마음을 단단히 굳힌 모양이었다.

"알았어 ㅋㅋ 그렇게 해 엄마. 난 좋지"

그렇게 모녀는 작당모의를 하고 25일 서울로 올라왔다. 26일엔 엄마 허리 진료가 예약되어 있었고 23년 연차를 탈탈 다 털어 쓴 나는 엄마의 신경과 진료를 12월 30일 토요일로 예약했다. 그리고 그 일주일, 나는 사실은, 엄마를 보며 조금은 걱정이 될 때도 있었다. 엄마는 지난 11월에는 마음이 편하고 그간 고단하신지 3일을 내리 주무셨고 외삼촌이 다녀가셨고 남은 이틀도 멍냥이에게 간식을 주고 별 특이한 것 없이 잘 지내시다 가셨었다. 짧은 기간, 엄마의 이상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12월, 엄마는 또 이틀 정도를 푹 쉬시더니 삼일 째부터 출근하는 나를 이것저것 도와주셨다. 그런데 엄마는, 과일을 이렇게 깎아 달라는 나의 부탁을 이틀, 삼일 기억하지 못하셨다. 강아지와 고양이에게 줄 간식을 헷갈리기도 하셨다. 익숙하지 않은 나의 살림이 낯설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싶었다. 정말 그렇다고 확신할 순 없었다. 그렇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낯설고 새로워서, 그래서 어려우실 거라고 나는 믿고 싶었다. 그리고 3일 정도가 지나자 엄마는 별 무리 없이 과일을 깎아 챙겨 주시고 멍냥이 간식도 챙겨주시고, 흐린 눈으로 못 본 척했던 지저분한 나의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셨다. 그렇게 또 나는 마음을 놓았다.



12월 30일, 예약해 둔 신경과에 갔다. 친절하신 간호사님의 안내를 받고 엄마의 진료 순서를 기다렸다. 나는 병원에 앉아 인터넷에서 보았던 병원 내부와 의사 선생님의 약력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 엄마의 진료 순서가 되어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 간단히 설명을 했다.

"어머님, 생활하시면서 뭐가 불편하세요?"

의사 선생님이 다시 엄마에게 물었고 엄마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금방 들은 것도 까먹고, 뭐 찾으러 왔는지 까먹을 때도 많고.. 기억이 잘 안 나요."

의사 선생님은 다시 몇 가지를 질문했다.

"주부신데 요리하는 건 문제없으세요? 냄비 태우신 적 있으세요? 은행 가서 돈 찾으실 수 있으세요? 중요한 거 못하겠다 싶으신 적 있으세요?"

질문은 이어졌고 엄마는 이어지는 질문들에 하나씩 차분히 대답했다. 잠깐씩 기억을 놓치는 것 말고 엄마는 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어머님, 제가 단어 세 개를 말한 건 데 따라 해 보세요. 그리고 기억하고 계시다가 나중에 제가 다시 물어보면 그때 또 얘기해 주세요. 보호자님은 가만히 계시고요"


'보호자'라는 단어가 마음에 꽂힌 순간이었다. 그간에도 여러 번 보호자로 불렸지만 이렇게 '보호자'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귀에 들어온 적은 없었다.  의사 선생님이 나에게 말한 '보호자'라는 단어는 많은 뜻과 의미가 내포되어 특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듯 느껴졌다. 무슨 이유였을까. 나는 그 이유를 꽤나 여러 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또 어학사전을 뒤적거려도 보았다. '보호자'라는 단어는 '어떤 사람을 보호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뜻하고 '보호'는 '위험이나 곤란 따위가 미치지 아니하도록 잘 보살펴 돌봄'라는 뜻이다.

뒤늦게야 정리된 생각은, '보호자가 어떤 위험이나 곤란 따위가 미치지 아니하도록'이란 말은, 외부의 위험이나 곤란을 피하는 것도 있지만 보호자의 생각이나 고집으로 피보호자를 위험하거나 곤란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보호자는 의사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다. 내가 엄마를 대신해 아파줄 수도 없다. 개입하지 않고, 엄마의 검사 과정을 지켜보고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도 보호자의 책임이다.


의사 선생님이 먼저 이야기한 세 개의 단어를 엄마는 잘 따라 했지만 다른 질문 후에 다시 물어봤을 때는 단어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이런 걸로 선별이 되는 건가?'  

'보호자'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조금은 불편한 마음으로 나는 그 모든 과정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의사 선생님은 엄마를 맞은편 침대에 걸터앉으라고 하더니 다시 여러 가지 질문들을 했고 행동들도 따라 하게 했고 직접 문제를 풀고 도형을 따라 그리라고도 했다. 지켜보는 내 입장에서 엄마가 잘 못한다고 느꼈던 건 도형 따라 그리기였다. 엄마가 그린 도형은 옆의 모형과 동일한 모습이 아니었다. 엄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연필을 잡은 손은 엄마 마음처럼 잘 안 움직이는 듯 보였다. 잠시 안쓰러움과 걱정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미리 걱정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병원에 들어갔다. 걱정은, 그 일이 일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라고 했다.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마음을 먹었던 이유 자체가 사실은 걱정과 두려움에 압도될까 봐 나 스스로를 미리 단속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약 15분에서 20분 정도 의사 선생님은 선별검사를 진행했다. 의사 선생님과의 검사를 끝내고 다시 밖으로  나와 간호사님이 가져다준 태블릿으로 꽤 많은 질문과 대답을 다시 하고 또 잠시 결과를 기다렸다.


처음 진료실에 들어간 지 약 한 시간 후, 알림 소리와 함께 가운데를 O로 표시한 엄마의 이름과 함께 진료실로 들어오라는 안내 문구가 병원 모니터에 떴다. 진료실로 들어가 다시 의사 선생님을 마주했다.

"저랑 같이 하신 선별검사랑 문답 검사를 봐서는 정확하게 진단을 내리기가 좀 애매한 부분이 있어요. 괜찮으시다면 뇌 MRI 검사랑 인지기능검사를 한 번 받아보시는 게 정확할 것 같고요."

'아무 문제도 없으신 거 같아요, 연세 드셔서 건망증이 생기신 거 같아요'

라는 답을 기대했던 나였던지라 의사 선생님의 설명이 좋게 들리지 않았다.

"검사는 해 보면 좋을 것 같긴 한데요.. 엄마가 생활이 단조로우시고 그런 이유로 좀 우울하신 것 같기도 한데 심리적인 문제는 없을까요?"

여전히 아니라고 믿고 싶은 나의 마음을 읽은 듯 나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의사 선생님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생활이 단조로우시기 때문에 덜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어요"

무거울 정도로 복잡했던 머릿속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헤아릴 수조차 없던 많은 생각들이 갑자기 재잘거림을 멈췄다.

"아... 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랬다. 내가 피하고 싶은 결과라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했다. 나는 그저 엄마의 보호자로서 정확한 진단이 나오기까지 지켜보는 역할을 해야 할 뿐, 그 과정에 개입하면 안 되는 거였다.

나를 쳐다보는 의사 선생님에게 대답했다.

"맞네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검사 예약하고 갈게요"



여전히 머릿속은 진공처럼 조용했고, 나와 엄마는 진료실을 나왔다. 간호사님이 다시 엄마 이름을 불렀고 나의 머릿속은 그제야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처럼 빠르게 새로운 생각들이 떠올랐다. MRI 검사를 할 병원에 일정 확인을 해야 하고 인지기능검사 일정도 확인해야 하니 조금 기다려 달라고 했다. 엄마 옆으로 돌아와 앉아 뇌 MRI 검사와 인지기능검사를 폭풍 검색했다. 다시 엄마의 이름이 불려졌을 때 나는 검사 일정을 확정하고 검사 비용들을 확인했다. MRI와, SNSB 검사가 각각 40만 원 정도라는 이야기에는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금액이 있을 텐데 왜 그 금액인지 다시 확인해 달라고 했고, SNSB 검사는 누가 진행하는 것이냐, 얼마나 시간이 걸리냐 등등 꽤나 까탈스럽게 질문들을 해댔다. 검사 비용은 다시 확인해서 알려주기로 하고 SNSB검사는 임상병리사가 진행하고 2시간에서 2시간 반이 걸린다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나와 엄마는 병원문을 나섰다.


정보 수집 차, 검색어를 '치매'로 넣고 잠시 찾아본 내용들 중 좋은 기분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글들을 상기하며, 엄마가 좋아하는 코스트코로 향했다. 엄마 표현으로는 주먹덩이만 한 눈이 퍼붓고 있었다.  

"날씨도 어설픈데 그냥 집에 갈까?"

엄마가 물었지만, 주먹덩이만 한 눈도 바닥에 떨어지니 금세 녹고 도로는 질퍽거리기는 했지만 얼지는 않은 듯했다. 엄마는 마트 중에 코스트코가 제일 좋다고 했다. 물건도 많고 천장이 높아 속이 뚫린다고 했다. 검사는 그다음 주 1월 5일 금요일이었고, 그 기간까지 나는 엄마가 좋아하는 걸 하고 엄마의 기분을 좋게 유지하며 '노화로 인한 건망증 외 아무 이상 없음'이란 결과가 나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동안 나는 엄마와 함께 있을 때면 더 많이 말을 하고 더 큰 소리로 웃었다. 개입하지 않고 지켜보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는 보호자로 지내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검사일 전까지 나는 걱정하고 두려운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그 감정들을 마주하는 대신 이 감정들의 정체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쉽게 하는 걱정들을 하나씩 글로 적어도 보았다. 그리고 그 걱정하는 마음들을 파고 들어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한 결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설적이게도 그 두려움의 근원을 다시 파고 들어가 보니 잃을까 봐 두려운 그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고 귀했다. 그걸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구체적이지 않고 희뿌연 안개처럼 막연하던 감정들이, 안개가 걷히고 선명하고 또렷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잘 시간이 되어 엄마와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는 왼쪽으로 돌아 엄마를 보고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는 자꾸만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어릴 때 그랬듯이.. 어릴 적 엄마의 손길에 깬 나는 짜증을 부렸더랬다. 못돼 먹은 딸년... 마흔을 훌쩍 넘겨 엄마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잠이 든 나는 행복했고 엄마도 행복하셨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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