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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퇴사했습니다 (2)

by 하우주

퇴사 당일, 출근해 자리에 앉아 있으니 경영팀 임원분이 오셔서 언제쯤 퇴근할 거냐고 물어봤다. 출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자꾸 보내려고 하시니, 내가 있는 게 불편하신가 싶어 오전 내로 정리하고 점심만 먹고 가겠노라 했더니 그러라고 하셨다. 보통 퇴사자들은 오전근무만 하고 가거나, 점심을 먹고 정리한 후에 이른 오후 시간에 나가곤 했다.



오전 일찌감치 컴퓨터 내부 파일들을 정리하고 전원을 끈 후 노트북, 전화선, 키보드, 듀얼 모니터 등 전산제품들의 너저분한 선들을 모두 하나씩 모아 끈과 밴드로 묶어 한 곳에 모아 두었다. 그리고는 얼마 되지 않는 책상 서랍 속의 짐들을 정리했다. 작은 종이 가방 하나도 다 차지 않을 정도로 개인 물품들은 적었다. 입사 2개월 이후부터 언제나, 언제든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도록 개인 물품을 최소화하면서 살자고 다짐하고 그렇게 3년을 지냈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를 비롯한 전산용품을 빼고 나면 책상 달력 하나가 전부였고, 먼저 퇴사했던 직원이 선물하고 간 휴대용 LED가 책상 옆 파티션에 붙어 있었다. 점심시간에 사무실 불을 다 끌 때면 그 작은 LED를 켜놓고 책을 읽곤 했다. 서랍 위와 책상 사이에 두고 쓰던 물티슈와 가장 아래 제일 큰 서랍에 항상 구비해 두던 간식 봉지, 실내화를 가지고 왔던 작은 천 가방과 필기구류 몇 개가 전부였다. 올해 것까지 쓰던 회사 다이어리 4개는 전날 모두 파쇄기에 넣고 남은 부분은 종이 쓰레기로 분류하여 버렸다. 부서 이동과 조직 변경이 잦은 곳이라 3년간 자리가 6번 정도 바뀌었고 그때마다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자리 이동을 하곤 했다. 동료들은 “짐이 그게 다예요?”라고 매번 놀란 표정으로 묻고 했다.


노트북과 전산용품을 두 번을 왔다 갔다 하며 반납하고 경영팀에 제출할 서류까지 가져다주고 나니 10시쯤이 되어 있었다. 점심시간까지 두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나는 회사 전 층을 다니며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던 모든 직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MBTI 결과 중 I 성향을 가진 극내향인이지만 회사에서 같이 일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내가 E성향일 것이라 생각했다. 회사에서의 나의 페르소나는 활달하고 말 잘하고 할 말 다 하고 잘 싸우는(?) 외향인 인간이었다. 같이 일을 해야 하는 경우엔 무작정 찾아가 인사하고 업무에 대해 물어보며 얼굴을 텄다. 그렇게 얼굴을 튼 후에는 인사도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한두 마디 말을 건네기도 하며 친한 척을 했다. 나는 평사원 중에 가장 높은 직급을 적극 활용해 아무한테나 말을 걸었다.



회사들의 분위기는 보통 두 가지로 나뉜다. 당연히 대부분의 모든 회사들이 회사의 몸집이 커지는 성장을 바라겠지만, 회사 내부의 분위기가 성장을 향해 가며 다 같이 으쌰으쌰 하는 경우가 있고, 그와는 완전히 반대로 성장을 외치지만 그 외침이 무색하게 생존에 급급한 경우가 있다. 그 분위기는, 회사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 순간 알 수 있다. 그리고 생존에 급급한 회사 사람들은, 또 당연히 자신들만의 생존에 급급해 타인에게 친절하지 않다.

이 회사 사람들 또한 친절하지 않았고, 누군가 첫 출근을 해도 아무도, 어떤 설명을 해주지도 않고 각자 자기 할 일들만 하곤 했다. 첫 출근하여 어리바리 긴장해 있는 사람들은 정수기가 어디 있는지조차 묻지 못하고 바짝 메마른 입술을 다시며 물조차 마시지 못하면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엉거주춤 서 있거나 앉아 있어야 했다. 사무실에 누군가 오면 먼지가 뽀얀 책상을 닦으라고 물티슈를 주고, 종이컵 하나를 주며 정수기 위치를 알려주는 건 늘 내 몫이었다. 오지랖일 수도 있는 그 행동들을 누군가,

“여긴 그런 곳이 아니다, 강하게 키워야 한다”

라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타박하면, 나는

“아무도 안 알려주는데 누군가 한 명은 알려주면 좋은 거 아니에요?"

라며 까칠하게 웃으며 대답하고,

“본인들이 할 거 아니면 가만히나 있지”

라고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나는 3년간을 때론 친절한, 때론 까칠한 ‘이 구역의 미친년’으로 지냈다.


회사에서 드라이하게 업무만 하면 되지 인간관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나의 경험상 결국 업무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업무적으로 풀지 못하면 인간적으로라도 풀어야 했다. 그럴 일을 안 만들면 된다, 그럴 일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 사는 모든 일은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사람의 일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오전 쉬는 시간에 친했던 직원들이 식당으로 부르더니 선물들을 건넸다. 내가 퇴사한다는 말을 듣고 뿌에엥 하며 울어버렸던 내가 대학에 들어간 해에 태어난 막내 직원은 오늘은 울지 않고 예쁜 찻잔을 주며, 찻잔은 두 개가 되어야 하니 나머지 하나는 내년 생일에 드릴 테니 계속 연락하겠다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각자가 고심하며 고른 선물들과 손 편지에 눈물이 찌잉.. 마음을 나눈 어린 직원들은 이 회사에서 내가 받은 많은 선물 중에 하나이다.


친했던 직원들과 차를 타고 회사에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맛집에 가 점심을 먹었다. 회사 근처에는 맛집이 많다.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점심시간에 회사 식당 밥이 아닌 밖에 나가 급하게 이동하며 점심을 먹고 그 와중에 가성비 좋은 커피들을 한 잔씩 손에 들고 종종걸음으로 들어오는 것도 마지막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시간을 내어 직원들과 함께 맛집을 찾아 저녁을 함께 하는 것도 꽤나 큰 즐거움이었다. 팍팍하고 각박한 회사 생활에서 우리는 각자 버틸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내야 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직원들을 올려 보낸 후 회사 근처 카페로 가 따뜻한 차 세 잔을 샀다. 경비 소장님께 오늘이 퇴사일이라는 인사를 드리고 회사의 청소 아주머니들과 같이 드시라고 차를 건넸다. 다들 각자 월급 받고 하는 일이겠지만, 그분들이 그곳에서 각자의 일을 해 주시는 것 자체가 감사했다. 가끔 말 안 듣고 올라가지 않는 주차 차단기도 올려 주셨고 그분들 덕분에 내가 일하는 많은 공간들이 깨끗함을 유지했다.


인사를 드리고 차를 가지고 나오는데 경비소장님이 밖에 나오셔서 손짓을 하셨다. 청소 아주머니들께서 인사를 하시고 싶어 하신다고.. 지금 오고 있다는 말씀에 차를 어정쩡하게 세워두고 내려서 기다리니 금세 아주머니들이 오셨다. 누군지 얼굴도 잘 모르실 거고, 별 것도 아닌 차 한 잔에 무슨 인사까지 하냐며 손사래를 치는 내게 한 분이 말씀하셨다. 얼굴도 잘 모르는 본인들에게 차 한잔이라도 줘서 고맙다고.. 그 말이 따뜻했다.. 그리도 다른 한 분은 오늘이 마침 교회 부흥회라며, 잘 되시기를 기도해 주겠다고 하셨다. 또다시 코끝이 찡해졌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아지와 산책을 나가려는데 낯선 카톡이 왔다. 그동안 고마웠다며,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던 경비 소장님이 카톡 선물하기를 보내신 거였다. 고마웠다며, 새로운 곳에 가서 힘내시라며, 행복한 인생을 응원하시겠다는 장문의 내용과 함께..

내가 해 드린 건 아주 가끔, 편의점의 2+1 행사 때 사 온 음료가 몇 번, 또 아주 가끔 생각날 때 사다 드린 커피 몇 잔이 전부였다. 얼마 되지도 않을 그 몇 번의 호의를 많이 고마워하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을, 그렇게 또 사람들은 따뜻한 마음들을 나누고 서로를 응원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나는 아마 이곳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것이다.




상투적인 이야기이겠지만, 지나고 나니 감사함만 남았다. 내 평생 이렇게 치열하게 삶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고민한 적이 없었다. 힘든 날을 겪으며 이 고통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은 더 깊이깊이 나와 삶에 대해 들여다보게 만들었고 나는 느리지만 조금씩 답을 찾아나갔다. 어쩌면 그 하나만으로, 나는 이 회사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힘들고 답답한 마음을 떨치려 나눈 작은 마음들은 눈덩이처럼 커져 돌아왔다. 결국 사랑밖에 남는 것이 없을 거라던, 많은 책에서 나온 말들은 진실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마음이 평안해지면서, 내 마음 하나가 사랑으로 가득 차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궁금했고, 모든 것이 연결된 것처럼 사랑은 사랑으로 돌아오며 그 크기를 키우고 더욱 짙어졌다.


그 시간들을 지나 헤매고 돌고 돌아 나의 마음을 확인하고 나니 삶이 가벼워지고 나는 행복해졌다. 내가 겪는 모든 순간들이 지금뿐임을 알고 나니, 오지 않을 미래를 알고 나니, ‘나중에’라는 말이 얼마나 의미 없는 말인지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지금 하고 싶은 일을 그냥 할 용기 또한 생겼다.


이렇게 모든 것에 감사하며, 다만 사랑함으로, 지금 여기 행복함으로 나만의 ‘감사행’을 읊조리며..

나는 오늘 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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