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기억력이란 참으로 믿을 것이 되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처음 받아들일 때 이미 '그 순간의 나'라는 사람에 의해 한 번 필터링되어 해석되고, 그때의 '객관적이라 우기는' 사실조차도 감정에 따라 각색되어 나에게 각인되고, 또 나라는 사람이 변해갈수록 기억은 조금씩 희미해지기도 하고, 덧칠되기도 하고, 또다시 그려지기도 한다.
그렇게 믿지 못할 나의 기억력이지만 첫 회사를 퇴사할 때 즈음의 회사의 분위기와 풍경과 그 느낌들을, 1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꽤나 상세히 기억한다 (혹은 기억한다고 생각한다). 그 풍경 중 기억나는 하나의 장면이 있다. 퇴사를 결정하고 퇴사일을 며칠 앞둔 나에게, 나보다 열 살 이상 많으셨던 친했던 부장님이 말씀하셨었다.
"너도 회사 생활 더 하다 보면 알겠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회사 생활이 다 비슷한데 그냥 더 다니는 건 어떠니?"
속상해서, 혹은 안타까워서 하신 부장님의 그 말씀에 나는 참 당돌하게도, 혹은 무례하게도 대꾸했었다.
"부장님, 검은 백조가 타고나서 검은 백조도 있겠지만 시커먼 흙탕물에 있으면 흰 백조도 검은 백조가 되는 거예요. 제가 아무리 나 혼자 흰 백조라고 한들, 시커먼 물에 있으면 검어지는 거 아니에요?"
새털이 물에 젖지 않는 과학적 원리 어쩌고를 떠나서, 나는 당시의 회사 상황을 그렇게 묘사했고 그렇기에 퇴사를 하겠노라 당당하게 이야기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참 시건방졌다.
5층 건물 중 회사 사무실은 4층이었는데, 1층에서 담배를 피우던 그 부장님은 4층까지 헐레벌떡 올라와
"하대리! 1층에 마이바흐 주차되어 있어!! 이건희 회장 차랑 똑같은 차야!!"
라며 알려주신 덕에 쏜살같이 같이 내려가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1미터 정도 멀찍이 떨어져서 반짝거리던 검정색 마이바흐를 구경했었다. 그렇게 상사라는 어려움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허물없이 지낼 정도로 첫 직장에서 3년 여를 친하게 지냈던 20대 후반 막내 직원의 이야기가 그 부장님께는 어떻게 들렸을까. 그러나 그 부장님께 대한 죄송스러운 마음을 차치하고, 내 인생 전반을 돌아보았을 때 당시의 결정은 '신이 도우셨다'라고 할 정도로 잘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어떤 회사나 조직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의견을 고수하고 있다.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조직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화두 또한 회사에 남느냐 떠나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일 수도 있을 듯하다.
오너의, 오너에 의한, 오너를 위한 회사의 운영과 이를 위한 회의와 보고가 업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조직에 있다 보니 부득이하게 그 방향으로 업무가 진행되고, 사람의 태도가 변하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사람들이 변하는 모습은 몇 가지 양상을 나타낸다.
1. 일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고 업무가 더 이상 재미있지 않다. 업무를 배우고 싶다, 성장하고 싶다는 욕구도 자연스레 없어진다. 아니다, 업무를 가르쳐 줄 만한 사람도 없고 성장을 도와줄 사수도 없다. 그런 괜찮은 어른들은 다 퇴사하고 없다. 열정에 넘쳐 뭔가를 좀 하려고 하면 여기저기서 방해를 하고 왜 시키지 않은 짓을 하냐고 뭐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적당히 시간 보내고 월급 받아 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회사 전체적으로 팽배해진다. 오너는 직원들에게 '열쩡'과 '패밀리쉽'을 강요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열쩡‘은 온데간데없고 좀비처럼 시간을 때우다 퇴근하게 된다. 회사에게도 마이너스이고, 성장하지 못하는 본인에게도 마이너스이다. 성장이 멈춘 것, 내가 퇴사를 준비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회사에서 일하는 즐거움이 없다는 건, 나에겐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
2. 회의와 보고 시간을 비롯한 전체적인 회사 생활에서 존중이나 객관적 사실, 직원 개인의 의견 등은 중요하지 않고 한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중요해지면, 가치 판단이 어려워지고 개인의 의견이나 생각은 점차 사라진다. 자연스럽게 보고서의 내용이 한 사람이 좋아하는 내용으로 채워지게 된다. 그 내용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영업의 경우, 한 사람이 원하는 매출 목표에 맞추어 숫자가 조정되고 전혀 현실성이 없다는 걸 본인 스스로 알고 있을지라도 하겠노라는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장밋빛 미래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다. 심해지면 마치 리플리증후군 환자처럼, 그 장밋빛 미래를 확신하며 점점 거짓말이 늘어간다. 재미있게도 점점 교묘해지는 거짓말을 오너는 믿고 싶어 한다. 욕심이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3. 책임회피형 인간으로 변하게 된다. 회의나 보고가 내용 전달 및 의사 결정을 돕는 과정이 아닌 누가 오늘 얼마큼 혼나고 욕을 먹느냐가 더 중요해지다 보면, 혼나고 욕먹지 않는 방향으로 사람들은 자신을 방어한다. 팀장, 임원의 위치가 무색하게 본인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언제나 "쟤가 그랬어요"로 결론이 난다. 시작하는 사람은 있는데 마무리하는 사람이 없고, 담당 실무자누군가 한 명이 망가진 프로젝트를 겨우 겨우 수습하기가 일쑤다. 당연히 실무자는 프로젝트 하나를 끝내기도 전에 이직을 준비하고 퇴사를 한다. 남은 사람들은(임원들은) "퇴사한 그 직원이 그랬어요."라는 말로 결론을 맺고 여전히 자리를 지킨다.
4. 논리가 힘을 잃는다. 언제나, 정말로 회사의 모든 업무가 한 사람이 원하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결론을 정해놓고 짜 맞추기식으로 진행된다. 때론 한 사람의 의견을 따르기 위해 고객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싸우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토론을 한다는 명목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해도, 정해진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현상의 일부분을 예로 들어 보이며 꽤나 논리적이려고 처음에는 노력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상대방이 허술한 논리에 대해 반박하면 그때부터는 '상대방의 말은 듣지 않고 우기기'를 시전 한다.
아마도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비슷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1번의 모습이 된 건 이미 오래전이다. 이 회사에 입사 후 약 열 번의 계절을 보내며, 나는 회사에 들어와 '적응'이라는 명목 하에 빠르게 변해가는 사람들, 전부터 있으면서 점점 더 고인 물이 되어가는 사람들, 전에는 참을 만했는데 이젠 더 못 참겠다며 나가는 사람들, 젊은 날의 나처럼 흙탕물이 튀기 전에 나가겠다며 빠른 퇴사를 결정하는 사람들을 무수히 본다. 재밌게도 '아무 생각 없이 월급만 받기에는 좋았다'며 퇴사 후 재입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재입사하는 사람들은 '월급쟁이'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기로 결심이라도 한 듯 더욱 빠르게 적응하고 변화한다, 마치 사전에 짜기라도 한 듯이 어딜 가나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마주하는 매일의 시간들 속에서 내가 나를 잃게 될까 봐 경계하면서, 모든 장면마다 배울 점이 있을 것이라 합리화해 본다. 어쩌면 훗날의 나에게 꼭 필요한 시간일 수도 있다는 아름다운 결론에 끼워 맞추기 위해 우기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정의한 흙탕물속에서 나는 물이 튈까 봐 털을 고르느라 분주하고 마음이 바쁘다. 맑은 물이건 흙탕물이건 넌 그래도 물 속에 있지 않냐는 타박에 '그건 그래'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어 자괴감이 밀려온다. 또다시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지금을 돌아보았을 때, 나는 어떤 장면을 기억할까. 지금의 조직은 15년 후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설레임으로 또 두려움으로 나는 15년 후를 그려본다. 그리고 미약하게나마, 지금의 마음이 미래에 닿을 수 있다면 최소한 내가 나를 잃지는 않았기를, 흙탕물이 튀었을지언정 툴툴 털고 맑은 물로 돌아간 나이기를 바래본다. 그런 나 자신을 위해 오늘도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