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함께 한 N요일
퇴사를 한 후 시골에 계신 엄마를 모시고 올라왔다. 퇴사를 준비하며 하고 싶은 일 중의 하나가 엄마와 시간 보내기였다. 전에는 엄마가 와 계셔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엄마는 아침 7시면 출근하는 딸을 안쓰러워하며 과일과 간식을 싸주고, 내가 칼퇴근을 하고 집에 와도 7시라 저녁 한 끼 같이 먹기 바빴다. 엄마와 저녁 한 끼 같이 하기 위해 나는 그 기간 동안은 모든 저녁 스케줄을 비워야 했다. 그 시간이 나에겐 가장 중요했고 언제나 일 순위였다. 퇴사를 하였으니 이젠 엄마와 함께 할 시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엄마의 스케줄도 나름 빡빡한지라 김장이 끝나야 했고, 동치미도 담그시고, 장독대의 장들도 한 번 점검하신 후에야 엄마는 나와 함께 올라올 수 있다고 하셨다. 혼자 계셔야 하는 아빠에게 미안함은 있어도 예전처럼 걱정은 되지 않으시는 듯했다.
시에서 관할하는 관광지를 관리하는 일을 하고 계신 아빠는 언제부턴가는 도시락도 싸가지 않으셨기에 엄마는 미안함을 덜 수 있었다. 아빠가 주방일을 하실 줄 모르신다며, 평생을 도와주질 않았다며 엄마는 불만이 많으셨었고, 마치 엄마가 안 계시면 아빠가 매일 굶으실 것처럼 걱정하셨었다. 그러나 작년 말부터 엄마의 병원행이 잦아지면서 엄마가 일주일간 나와 지낸 후 돌아간 주방의 풍경은 깨끗하고 깔끔하기 그지없었고, 아빠는 밥도 잘해 드시고 된장찌개도 끓여 엄마가 해 두고 온 반찬들로 따박따박 식사를 챙겨 드셨다고 했다.
엄마가 떠날 때처럼 정돈된 그릇들과 물기 없이 깔끔하게 닦인 싱크대를 보며 엄마는 “혼자도 잘해 드시는데 그동안 괜히 걱정했다”며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죄책감을 덜은 안도감과 이렇게 잘하시면서 그동안 도와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과, 당신의 필요 유무로 존재의 이유를 찾는 많은 사람들처럼 ‘내가 없어도 잘 사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슬며시 찾아오는 어느 정도의 슬픔 또한 느껴지는 그런 복잡한 표정이었다.
자식들이 품을 떠난 이후에도 엄마는 언제나 삼시세끼 아빠에게 밥을 차려 드리거나 도시락을 싸 드렸다. 엄마는, 가장이 돈을 벌어다 주고 그 돈을 쓰는 것에 대해 고마움을 잊지 않으셨고, 그 고마움에 대해 자식들에게 이야기하셨다. 또 그렇게 받은 돈으로 매 끼니 식사를 챙겨드리는 것이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하셨으며, 그렇게 사는 것이 월급을 통째로 고스란히 맡기는 가장에 대한 의리라 생각하셨다.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건 부모님의 가치관이고, 나는 그런 엄마가 꽤 멋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상대방에게 받은 부분에 고마워하며 그에 대해 내가 할 일을 하는 것, 부부간의 의리.. 그 의리 또한 상대방에 대한 감사이자 존중이자 사랑의 한 형태라고, 나는 최근에야 깨달았다.
어쨌건 그 이후로 엄마는 몇 번을 더 딸의 집에서 길면 2주, 짧으면 1주일간 머물다 내려가셨다. 이번에도 병원을 핑계로 대긴 했으나 퇴사하고 집에 있으면서 엄마와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에 나는 아빠에겐 미안하지만 엄마를 졸라 12일의 시간을 허락받았다.
엄마는 우리 집에 오면 이틀 정도는 거의 잠만 주무신다. 이번에도 엄마는 이틀을 내리 쉬시며 김장의 노곤함을 풀었고 나 또한 웬만하면 다른 약속을 잡지 않고 엄마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엄마와 카페에 가서 카공족들처럼 앉아 나는 일을 하고 엄마는 색칠공부며, 글씨 쓰기 등을 하기도 했고 하루에 한 번은 밖에 나가 외식을 하거나 음식들을 포장해 와 먹기도 하였다. 엄마가 좋아하는 코스트코도 다녀오고 주변 공원에 산책을 하며 단조로운 엄마의 생활에 조금이라도 새로운 무언가로 자극을 주고 싶었다. 지속적으로 뇌에 새로운 자극을 주면 치매로 진행되는 속도가 조금 더 늦춰지고 이대로 유지만 된다고 하면 더 바랄 것이 없을 듯했다.
그러나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하루종일 엄마와 붙어 지내보니 엄마는 예전보다 더 새로운 정보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친구가 해 준 밑반찬을 맛있게 먹으면서도 엄마는 그 반찬을 누가 해 줬는지 몇 번을 물었고, 현금으로 챙겨 온 비상금을 나에게 주고도 돈을 하나도 안 가지고 온 것 같다고 몇 번을 이야기했다. 정말로 기억이 안 나는 걸까, 내 이야기를 흘려들은 걸까.. 여전히 후자일 것이라 우기고 싶은 나의 마음은 몇 번씩 똑같은 대답을 하다가 설핏 짜증이 섞이기도 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과 본인의 기억이 흐려지고 있다는 불안함으로 엄마는 익숙한 당신 자신의 살림이 아닌 낯선 딸의 살림에 대해서도 조심스러워하는 듯했다. 그게 신경이 쓰여서였을까, 엄마는 남편과 사는 게 젤 편하다는 이야기를 흘리듯 하며 영감이 보고 싶어 집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웃으며 했다. 딸의 집에서도 편치 못한 듯한 모습에 나의 말투에 섞인 짜증이 엄마에게 전달된 것은 아닌지, 미안함과 속상함이 마음을 짓눌렀다.
엄마가 시골로 내려가기 이틀 전 일 년에 한 번씩 받아야 하는 치매 진단을 위해 다시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갔다. 엄마는 MMSE(Mini-Mental State Examination) 검사(치매 선별용 간이정신상태검사)를 받으셨고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그러나 우려했듯이.. 작년보다 검사 결과는 더 나빠져 있었다. 애써, 우리 집에는 달력도 없고 나 또한 퇴사 후 집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지력(지남력)이 떨어졌을 수도 있겠다 우겨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작년에 비해 5점이나 떨어진 점수를 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현재의 상태에 대한 문항들을 체크하며 작년 이맘때보다는 엄마의 기분이 더 나아 보였고, 지금 행복하다는 엄마의 대답에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다행이다 서글픈 위로를 스스로에게 건넸다.
결국 엄마에게는 한 알의 약이 더 추가되었고 나는 약을 챙겨드시는 것만큼이나 공부와 걷기가 중요하다는 잔소리와 협박을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했다. 언제부턴가,
“잔소리해 주는 딸이 있어 행복하다”
고 말하는 엄마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또 나에게 고맙다며, 딸 말을 잘 듣겠다고 했다. 나는 몇 번의 다짐과 약속을 받아내고 쿠팡으로 화투의 오광 퍼즐을 주문했다. 설 전까지 한 번씩 다 맞춰서 검사를 맡으라는 으름장과 함께..
엄마가 계셨던 며칠 중에 두 번, 나는 아침에 일어나 엄마가 자고 있는 방으로 가 엄마 옆에 누워 엄마를 가만히 껴안았다. 첫날은 눈물이 날 것 같아 얼른 일어나려 했더니 엄마가 이렇게 조금만 더 누워있다가 일어나라고 했다. 두 번째 날은 엄마가 팔베개를 해주겠다기에 팔에 머리를 올렸더니
“아이고, 이제 무거워서 팔베개도 못해주겠네. 배 위에 올려놓고 자던 게 언제 이렇게 무거워졌냐”
하셨다.
너무 가난했던 어린 날에, 방에 보일러를 때지 못해 방바닥이 차가워 엄마는 갓난쟁이인 나를 배 위에 올려두고 주무셨다고 했다. 머리가 무겁다며 얼른 팔을 빼시는 엄마 때문에 우린 까르르 웃으며 이불속에서 옛날이야기를 했다.
12일의 밤을 함께 보내고 220km를 운전해 엄마를 모셔다 드리고, 당일에 올라와야 하는 내가 안쓰러워 엄마는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그런 엄마가 짠해서 나는 또 미안했다. 언제나 너무 사랑해서, 서로를 너무 아껴주다가 티격태격하는 것이 엄마와 딸이 아닐까.
이젠 매일 하루에 한두 번씩 통화의 끝에 ‘우주만큼 사랑한다’고 앞다투어 이야기하며 서로를 너무도 사랑함을, 그래서 서로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며 살고 있으니 이대로도 참 감사한 일이다 생각하면서도.. 더해주지 못해 아쉬운 마음은 또다시 불안함과 두려움을 불러온다.
또 한 해가 지나간다. 새해의 달력을 준비하며 엄마의 시간만큼은 흐르지 않았으면, 아니 조금만 더 천천히 흘렀으면 하는 부질없는 바람을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행복한 일들만 가득하길, 그 행복한 모든 시간들은 잊지 않고 기억해 주길 또 기도해 본다. 신께서 모든 곳에 할 수 없어 엄마를 보내셨다지만, 그렇게 왔다가 늙고 약해지는 엄마를 보는 자식의 마음은 헤아리지 않으신 것이 틀림없다며 나는 신에게 불평을 한다. 그럼에도 돌아서면 어찌할 방법이 없어 이 기도가 멀리 신이 계신 그 별까지 가 닿길 바라며 또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은다.
A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