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만난 조카가 말했다.
“고모, 시간이 나이랑 같은 속도로 간다더니 정말 빨리 가”
이제 30대에 접어든 녀석은 20대와는 비교도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시간이 가고 나이가 든다며 내 앞에서 푸념을 했다.
“나이랑 같은 속도로 가지. 고모는 어떻겠냐”
나의 대꾸에 조카는 입을 다물었고 잠시 후 우린 한참을 웃었다.
이렇게 금방, 순식간에 2024년 한 해가 지나가 버리고 단 이틀만을 남기고 있다. 올해는 특히나 크리스마스도, 연말도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 매년 딱히 특별하지 않게 보낸 12월이지만 올해는 유난히 길거리가 조용하게 느껴진다.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럽고(말로만 듣던 계엄이란 것을 실제 경험할 줄이야.. 그 어느 때보다 분노가 차올랐던 12월이었다.) 경제적으로도 심란하다(파랗게 파랗게 물든 나의 주식들이여..). 그리고 오늘 아침 안타깝고 슬픈 마음으로 충격적인 비행기 사고 소식을 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뉴스로 접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보다 각자 개인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큰 변화와 충격, 슬픈 일 혹은 기쁜 일들로 기억될 한 해일 것이다.
나에게 2024년은 특별하고 소중한 해이다.
올해 초 엄마가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으셨고 우리 가족은 그저 관리하면서 속도를 늦추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이 무서운 병이 엄마와 함께 하고 있음을 인지한 이후, 다들 나름의 자리에서 각자의 색깔로 엄마와의 시간을 채색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나는 엄마에게 매일 사랑을 고백하고, ‘사랑해’라는 말은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해’로 바뀌었고 다시 ‘우주만큼 사랑해’가 되어 엄마와 나는 아침 통화 중에 누가 먼저 이 말을 했냐를 두고 티격태격하기도 한다. 사랑한다는 표현이 익숙해진 엄마는 아빠에게, 다른 가족들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곧잘 하신다. 표현이 익숙하지 못한 아빠조차 가끔 약주를 하신 날이면 엄마의 사랑한다는 말에 ‘응~ 사랑해’라고 답할 만큼 이 말은 우리 가족에게 평범한 인사가 되어 가고 있다. 그 일련의 과정들을 보며 나는 사랑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의 힘을 느낀다. 엄마는 전보다 더 행복해하고 사랑스러워지셨고 그걸 보는 가족들 또한 행복하다.
아지와 냥이 둘 다 방광염으로 고생한 한 해였다. 아지는 내년 5월이면 8살이 되어 노견이 될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하고 냥이는 올해 초 입원을 하여 고생을 하였으니 물 잘 마시며 잘 지내주길 바랄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인연과 우연들이 만나고 합쳐져 퇴사라는 결정을 하고, 2년간 조용히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준비해 온 나의 일이 이젠 중간 정도를 지나 결승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으로 머뭇거린 시간들은, 지금 와 돌이켜 보니 가장 필요한 때를 맞추기 위한 숨 고르기였고, 가장 필요한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이었고, 가장 필요한 일들이 일어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었다. 될 일은 된다는 책 제목처럼 많은 일들이 톱니바퀴가 물려 돌아가며 거대한 함선이 천천히 움직이듯 그렇게 만들어져 가고 있으니, 매 순간 ‘운이 좋다’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일들로 인해 감사함을 배워가는 중이다.
삶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한 해였고 늘 머리로, 생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려던 습관에서 벗어나 어느 순간 툭! 하고 생각이 마음으로 내려왔다. 지구가 태양을 두 번을 돌고 나서야, 나는 삶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가슴으로 살아야 함을 깨닫고 알게 되었다. 여전히 마음보다 먼저 앞서는 생각들로 머리가 무거워질 때도 있으나, 삶이 가벼움을, 그리하여 나 또한 평안함을 알아가는 순간들이 많아지고 있어 많은 순간 나는 행복하다. 행복해지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미 행복함을, 지금 이 순간 온전하고 완전하다는 생각을 꽤(!) 자주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얼마간의 수업료를 낸 이후 귀한 인연들을 만났고, 서로의 글과 그림들을 응원해 주고 격려해 주며 어쩌면 이전과 같을 일주일의 어느 순간을 나만의 색으로 채울 수 있도록 서로 돕고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타인들과 마음을 나눈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데, 그 어려운 일을 함께 하는 벗들이 생겼다. 그런 연유로 우리가 겪은 그리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책의 마지막 챕터처럼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나게 되었다.
아마도 두 밤을 더 보낸 후 맞이할 2025년은 작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흘러가는 그 시간들의 어느 시점에,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어느 순간들을 우리는 글로, 그림으로 기록하며 기억의 한 켠으로 깊숙이 넣어둘 것이다. 무엇으로 그림을 그릴지, 어떤 색으로 그림을 채울지, 또 어떤 단어들로 글을 채워 나갈지 기대하며 새해를 맞을 준비를 한다. 모쪼록 새해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슬픔보단 기쁨이 더 많기를, 우는 일보단 웃는 일이 더 많기를, 절망보단 희망이 더 많기를 기도해 본다. 이만하면 살만한 국가라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하기를, 파란색 주식 차트보단 빨간색 주식 차트를 볼 수 있길 희망하고, 길에서 사는 아지들과 냥이들이 가족을 찾거나 조금 더 따뜻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본다. 새해는 아주 조금만 더, 사랑이 넘치고 따뜻한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PS. 깊은 슬픔 속에 있는 무안 비행기 사고의 유가족분들께 깊은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